잘나가는 외국계 증권사의 30대 임원에게 물었다.
“젊은 나이에 임원 되고 직장도 안정되니 얼마나 좋으세요?”
그의 대답이 뜻밖이었다.
“저는요, 항상 ‘을’이에요. 투자자들 모셔야죠, 고객 기업들 모셔야죠. 설이나 추석 때는 선물 하나 안 들어오고 보낼 곳뿐이에요. 기업의 담당자를 만나려 해도 우선 여비서한테 잘 보여야 하는 걸요.”
세상이 많이 변했다지만 사회 곳곳에 ‘갑을 관계’는 여전한 모양이다.
스스로 을은커녕 ‘병’이나 ‘정’만 해왔다는 한 중소기업인은 또 이렇게 말했다.
“한번은 거래처 임원과 술을 마셨습니다. 젊은 사람의 온갖 비위를 다 맞춰주며 술을 마신 뒤 계산하는데 그러는 거예요. 다음주에 회사 사람들과 회식하러 올 건데 그것도 계산해 놓으라고요. 기분 참….”
어느 사회나 힘센 사람과 약한 사람이 있게 마련이고, 때로는 상대방의 생사여탈권을 쥔 사람도 있다. 갑을 관계는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수많은 갑과 을의 연결고리들이 얼마나 투명하고 상호 발전적이냐는 한 사회의 건강성을 보여주는 지표다.
한국의 청렴성지수는 지난해 국제투명성기구 조사에서 133개국 가운데 50위였다. 사회 전반에 아직 부패가 많다는 뜻이다. 올해 들어서도 정계 관계 군대 등에서 뇌물수수와 비리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다.
정치권과의 스캔들이 터질 때마다 ‘돈 주고 몸도 뺏겼다’며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기업들은 과연 비리에서 자유로운가. 주한 일본기업인들의 모임인 재팬클럽은 얼마 전 한국 정부에 “기업간 납품을 할 때 뇌물을 요구하는 관행이 많다”고 호소했다. 국내 대기업들은 계속 ‘윤리경영’을 외쳐왔지만 기업간 비리는 더욱 은밀해지고 규모도 커졌다는 것이다.
비리까지는 아니라도 한국의 비즈니스계는 아직 실력보다 연줄과 접대가 중요하다는 사람이 많다. 손꼽히는 국내 대기업 중에 오너의 사돈의 팔촌이라도 동원하지 않으면 그 회사와 거래를 하지 못한다는 경우도 봤다.
빌 게이츠가 한국에 태어났다면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대기업을 키우지 못했으리라고들 한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한국의 잘못된 갑을 관계도 한몫했을 것이다. 빌 게이츠는 직원 40명의 작은 회사를 운영할 때 기술과 배짱만으로 IBM 등 글로벌 대기업과 거래하면서 회사를 키워갔다. 한국이라면 가능했을까.
한국이 경제 규모에 비해 실력 있는 중소기업이 적은 것, 한국의 주력 산업들조차 대부분 핵심 부품을 해외에서 수입하는 것, 수출은 성장하는데 내수 침체와 일자리 부족은 계속되는 것….
이러한 문제들을 푸는 매듭의 하나는 바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건강한 협력관계일 것이다.
신연수 경제부 차장 yssh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