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분의 이름을 가나다순으로 이어 본다. 권영길 김근태 김덕룡 김문수 김원기 노무현 노회찬 박근혜 손학규 원희룡 유시민 이광재 이명박 이부영 이한구 이해찬 정동영 천정배 한화갑 홍재형.
이들은 새 일자리를 몇 개나 만들어 냈나. 총선을 빌려 국회의원 자리 26개를 부활시키는 데 기여한 분들은 있다(273개에서 299개로). 국회의원 보좌관 자리도 좀 늘렸다. 정부 안팎에 ‘코드직(職)’도 적잖게 마련했다. 주위를 맴돌던 실업자를 한두 명 또는 수십 명까지 구제한 분들도 있음 직하다.
▼‘민주화의 功’ 보상은 끝났다▼
그렇다면 이런 분들은 ‘일자리 창출 유공자’인가. 이들이 ‘투자 활성화와 일자리 만들기’를 열심히 외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분들이 일으킨 일자리는 국민의 세금이나 생산자의 땀을 먹고 사는 자리가 대부분이다.
물론 투자 유치와 그 결과로서의 고용 확대를 위해 직접 뛰는 분도 있다. 그러나 기업투자 늘리기에 공헌하기보다는 ‘정치적 투기(投機) 종목 개발과 이에 동원할 일자리 만들기’에서 실력을 발휘하는 분들이 더 많아 보인다.
그 와중에 국내를 벗어나 해외에 새 둥지를 틀려고 몸부림치는 기업과 돈이 급증하고, 한국을 냉대하는 외국자본이 늘었다. 당연히 일자리도 함께 달아났다. 위에 거명된 분들 가운데 일부는 ‘중국에 일자리 많이 만들어 준 국제 유공자’ 반열에 올려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왜 일자리 문제를 놓고 대통령, 국회의장, 정당 리더, 잠재적 차기권력 주자, 코드실세(實勢)의 이름을 들먹이나. 권력 지분(持分)만큼 민생에 대한 책임 지분도 크기 때문이다. 나아가 오늘과 내일의 국가 운명, 국민 팔자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나눠 가진 분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하기에 따라선 모두 가난하게 잘살아야 하는 ‘웰빈(well貧)’시대가 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들 뒤에는 이른바 민주화 세력도 있고 산업화 세력도 있다. ‘노사모’도 있고 ‘박사모’도 있다. ‘주사파(主思派) 386’도 있고 ‘전향한 386’도 있다. 이들이 뒤엉켜 나라의 모습을 새로 그리고 있다.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은 공통점도 있다. 과거를 이용하는 데는 경쟁적이고 잔꾀도 만만찮지만 나라의 원대한 미래를 열어가는 데는 경쟁력도, 비전도 보여 주지 못하는 점이다.
어느 세력이나 공(功)은 있다. 그러나 이미 역사가 된 지난날의 공이다. 또 양측은 공의 열매를 벌써 충분히 따먹었다. 일부 산업화 세력은 국민의 맨발에 신발 신겨 준 공으로, 다른 측면의 죄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아직 건재하다. 일부 민주화 세력은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을 이룩하는 데는 벽돌 몇 장도 나르지 않았지만 거의 완전한 권력을 쥐었다.
이로써 어느 쪽이건 보상받을 만큼 받았다. 더 보상받고 더 오래 시대의 주역이 되겠다면 다른 공을 세워야 한다. 그러지 못하고 흘러간 공만 우려먹고 반대편의 과(過)만 공격해 전리품을 더 챙기려 한다면 뻔뻔하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성취를 엮어 새로운 국운을 개척하는 데 유효한 역할을 하기는커녕 국력 소진의 역기능만 한다면 무대에서 퇴장당해 마땅하다. 미래주(株)가 아닌 ‘과거 종목’을 무기로 권력전쟁에 몰입해 나라를 갈가리 찢어 놓는 정치의 피해자는 실업자만이 아니다.
▼언제까지 民心을 시험할 셈인가▼
국민 셋 가운데 둘은 지금이 국가적 위기상황이라고 보고 있다(11일 코리아리서치센터-동아일보 여론조사). 이 글 머리에 오른 분들과 민주국가 주권자인 국민 앞에 물음을 던지고 싶다.
다수 국민은 국가적 위기 촉발의 진앙(震央)을 하염없이 지켜보기만 할까. 나라가 더 흔들리게 되면 민심(民心)은 어떤 행동을 택할까. 혹독한 독재정치가 386세력을 낳았듯이, 처참한 국가경영 실패가 제3세력의 등장을 재촉하지 않을까. 오늘날의 위기상황에 책임이 없는데도 가장 큰 피해자가 되고 있는 청년들과 자라나는 세대가 386(또는 486)을 맹목적으로 답습할까. 독재정권이 386에 대한 가해자였다면 ‘노무현-386정권’은 그 후배세대와 국가적 위기를 체감하는 많은 국민에게 어떤 존재일까.
배인준 수석논설위원 inj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