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 있었던 일을 조사하겠다는 것일까. 또 무슨 일을 한 사람들까지 조사하겠다는 것일까. 열린우리당이 국회에 상정한 친일진상규명법(약칭) 개정안은 조사대상 기간과 조사대상 행위 등이 분명하지 않다. 따라서 법 집행자인 진상규명위원회의 해석과 적용에 따라 조사대상 범위가 늘거나 줄어들 수 있어 정치적 의도가 끼어들 틈이 많다.
○제1조 ‘국권침탈 전후’부터 문제
개정안 제1조는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 전후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로 조사대상의 시간적 범위를 규정하고 있다. 기존법은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였다. 어쨌든 그 시점에 대해 논란이 있을 수 있는 ‘국권침탈’은 법률적으로 적절한 용어는 아니다.
국회 행정자치위원회의 장인식(張仁植) 수석전문위원도 최근 법안 검토보고서에서 “국가보훈처는 을미왜변(1895년)을, 민족문제연구소를 비롯한 일부 민간연구소는 을사조약 체결(1905년)을 국권침탈 시점으로 보고 있는 등 통일적 기준이 없다”고 지적하면서 조사대상 시점을 보다 구체적으로 규정할 것을 촉구했다. 을미왜변은 일본군이 궁궐에 침입해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이고, 을사조약은 일제가 조선 정부의 외교권을 빼앗은 것으로 10년의 시간적 차이가 있다.
○‘현저한 행위’와 ‘적극 협력’은 뭘까
개정안이 열거한 친일반민족행위자의 22가지 유형에도 불명확한 개념이 많다. 일반 관리 또는 일반 군경(軍警) 중에서 ‘일본제국주의에 협력한 행위가 현저한 사람’이라는 식으로 규정한 것이 6가지 유형이나 된다. 또한 문화와 경제 등의 분야에서 일제의 침탈행위 등에 ‘적극 협력한 사람’이라는 식으로 규정한 것도 4가지 유형이나 된다.
무엇이 현저한 것이고, 어느 정도가 적극적인 것인지에 대한 합리적인 기준이 제시돼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 10가지 유형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범위를 정하는 것은 진상규명위원회의 재량에 전적으로 맡겨져 있다는 얘기가 된다. 이처럼 광범위한 재량권은 법률로서 중대한 흠이 된다는 게 법조계와 학계의 지적.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판단이 개입할 여지가 크기 때문이다. 위원회 구성에 여권이 결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점을 고려하면 그 위험은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법보다 더 포괄적인 개정안
3월 국회에서 통과된 기존법은 개정안보다야 구체적인 편인데도 심의과정에서 정부 관계자들조차 친일반민족행위의 유형이 포괄적이고 추상적이어서 법이 그대로 시행될 경우 사회적 갈등을 야기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렇다면 기존법보다도 훨씬 포괄적이고 추상적인 개정안의 문제점은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일례로 기존법은 ‘판·검사로서 우리 민족의 감금 고문 학대 등 탄압에 앞장선 행위’라고 대표적인 행위 유형을 예시하고 있으나, 개정안은 ‘판·검사와 일제에 협력한 행위가 현저한 사법관리’라고만 규정했다. 사실상 일제강점기 때 판·검사와 사법관리를 지낸 모든 사람들로 조사대상을 확대한 셈이다. 또한 기존법엔 ‘국권회복을 위해 투쟁하는 단체나 개인의 활동을 강제해산 또는 감금 폭행하는 방법으로 방해한 행위’라고 돼 있으나, 개정안엔 강제해산 감금 폭행 등의 구체적인 방법이 삭제된 채 그냥 ‘방해한 자’라고만 규정돼 있다.
○조사대상을 무한정 확대할 수도
그 밖에도 유사한 사례는 많다. 특히 개정안 제20조는 “22가지의 유형에 해당하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친일반민족행위의 정상이 현저히 확인되는 경우에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선정할 수 있다”고 규정해 향후 거센 논란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예상된다. 조사대상을 무한정 넓힐 수 있는 길을 열어두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헌법재판소 연구관 출신의 변호사는 “개정안의 애매한 규정은 친일반민족행위자를 무수히 양산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서울고법의 한 판사는 “친일진상규명법이 처벌법은 아니라 해도 조사대상자들의 인격권을 침해할 가능성이 크므로 처벌법 못지않게 친일행위의 요건을 엄격히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불명확한 법률은 그 자체로 위헌
미국에서는 법률의 내용이 애매모호하거나 대상이 지나치게 광범위할 경우 그 자체로 위헌이라는 확고한 원칙이 연방대법원의 판례로 확립돼 있다. ‘막연하기 때문에 무효(Void for Vagueness)’라는 원칙과 ‘지나치게 광범위하므로 무효(The Overbreadth Doctrine)’라는 원칙은 미국의 모든 법원에서 위헌 여부를 가리는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
이들 원칙에 따라 미 연방대법원은 1954년 영화의 검열기준으로 ‘유해하지 않아야 한다’거나 ‘부도덕하거나 도덕을 타락하게 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한 법률 조항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 우리 헌법재판소도 2002년 ‘공공의 안녕질서 또는 미풍양속을 해하는’ 온라인 매체상의 표현물을 규제해 온 전기통신사업법 53조에 대해 같은 원칙을 적용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
불명확하고 광범위한 법률조항이 위헌 결정을 받은 국내외 사례법률조항위헌 이유위헌결정 기관 및 시기영화 검열 기준으로 ‘신성모독적’너무 불명확한 조건으로 검열관이 이 기준으로 허가나 불허를 결정함은 명확성과 구체성을 잃어 위헌미국 연방대법원, 1952년영화 검열 기준 관련 ‘유해하지 않아야 한다’ ‘부도덕하거나 도덕을 타락하게 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개념이 너무 애매하고 명확성과 구체성이 없어 위헌미국 연방대법원, 1954년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중 ‘현저히 사회적 불안을 야기할 우려가 있는 집회 또는 시위’적용범위가 지나치게 광범위하고 불명확하므로 위헌 소지 있음한국 헌법재판소, 1992년
통신품위법 중 ‘인터넷이나 온라인서비스를 통해 미성년자들에게 외설적인(indecent) 자료를 배포하는 것을 금지’지나치게 광범위하고 모호하므로 위헌미국 연방대법원, 1997년전기통신사업법 중 ‘공공의 안녕질서 또는 미풍양속을 해하는 온라인 매체상의 표현물 규제’어떠한 표현행위가 공공질서와 미풍양속에 반하는 것인지 구체화하지 않았으므로 위헌한국 헌법재판소, 2002년
윤종구기자 jkmas@donga.com
이상록기자 myzoda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