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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 친일규명법 개정안]억울해도 구제받을 길 막막

입력 | 2004-09-15 18:39:00


《방대한 조직과 정보에다 강제수단까지 갖고 있는 공권력 앞에 개인은 무력할 수밖에 없다. 형사소송법이 당사자대등주의를 지향하고 있는 것도 이 같은 불균형에 따른 기본권침해를 막기 위한 것. 당사자대등주의란 소송상 대립하는 당사자에게 공격과 방어를 대등하게 할 수 있는 수단과 기회를 주는 것을 말한다. 형사재판에선 공권력의 공격권이 아니라 상대적 약자인 피의자와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이 핵심이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이 국회에 상정한 친일진상규명법(약칭) 개정안은 이를 깡그리 무시하고 있다. 진상규명위원회에는 무제한에 가까운 공격방법을 허용하면서 조사대상자(유족 및 자손 포함)는 두 손을 묶어두다시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의신청권이 유일한 방어권

개정안은 조사대상을 애매모호하게 규정함으로써 진상규명위원회가 사실상 ‘원하는 것은 거의 무엇이든지’ 조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거기에다 동행명령장 제도 등을 통해 위원회의 조사권한에 강제력까지 부여하고 있다. 이에 비해 조사대상자에게 보장하고 있는 방어권은 조사결과에 대한 이의신청권이 유일하다.

이의신청에 대한 위원회의 처리결과(서면통지)를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라도 개정안에 다른 불복절차나 구제절차는 없다. 따라서 위원회의 처분에 대한 취소를 요구하는 행정소송을 제기할 수밖에 없으나 국가를 상대로 한 행정소송 또한 여간 번거롭고 복잡한 일이 아니다. 재판과정에서 조사내용을 둘러싼 논란으로 제2, 제3의 피해를 볼 가능성도 있다.

○형소법의 방어권 보장 수준

법조인들은 개정안이 처벌법에 준하는 성격을 갖고 있는 만큼 조사대상자에게 형소법 수준의 방어권이 보장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형소법은 피의자의 △변호인선임권 △진술거부권 △(피의자와 변호인의) 접견교통권 △증거보전청구권 △체포·구속 등에 대한 적부(適否)심사청구권 등을 보장하고 있다.

재판에 회부된 피고인에게도 보석청구권과 변호인선임권, 재판부기피신청권, 증거조사참여권, 최후진술권 등의 방어권이 보장된다. 무죄가 확정되면 국가보상 청구를 할 수도 있다. 법무부가 마련한 형소법 개정안은 수사기관이 피의자를 신문하는 모든 과정에 대한 변호인의 참여권과 구속된 피의자 및 피고인 전원에 대한 국선변호인 선임권도 보장하고 있다.

○제3자의 방어권 침해 가능성

개정안 제23조는 ‘일본제국주의에 협력한 행위에 관련된 증거·자료 등을 발견 또는 제출한 자에게 필요한 보상 또는 지원을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반면에 조사대상자를 음해할 목적으로 허위진술을 하거나 허위자료를 제출한 사람에 대한 기존법의 처벌 조항은 삭제했다. 결국 제보를 잘하면 상을 받고 잘못해도 벌 받을 염려가 없다는 얘기가 된다.

이를 선의로 해석한다면 진상규명 작업에 일반인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뒤집어 생각해 보면 제3자에 의한 방어권 침해를 제도적으로 허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 같은 제도적 허점을 악용한 의도적이고 조직적인 여론몰이가 특히 우려된다. 친일진상규명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갈등과 분열이 그러한 우려를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

○불평등 공방은 진실왜곡 위험

형소법이 피의자나 피고인의 방어권을 철저히 보장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인권보호를 위한 것이다. 하지만 방어권 보장은 실체적 진실 발견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당사자들이 대등하게 공방을 펼치는 것이 진실 발견에 가장 효율적이라는 사실은 형사재판의 역사에서 경험적으로 검증된 것이다.

반대로 조사주체에 막강하고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하면서 조사대상자에게 상응한 대응수단을 보장하지 않을 때는 조사과정이 왜곡될 위험이 높다. 그럴 경우 공정하고 정확한 조사결과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더욱이 친일진상규명처럼 논란이 많은 사안은 조사대상자의 방어권을 충분히 보장해야 판정결과에 따른 후유증이나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다.

○이의신청 판단은 제3의 기관에

서울고법의 한 중견판사는 “조사결과를 수긍하지 못하는 조사대상자들의 이의신청에 사법절차를 준용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이의신청에 대한 판단권한을 조사주체인 진상규명위원회가 아니라 법관이나 제3의 기관 등 중립적인 곳에 맡기자는 것. 친일진상규명의 경우 재심절차도 마련돼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런 제도가 더욱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위원회가 조사와 심사, 판정을 모두 끝낸 뒤에 형식적인 이의신청 절차를 둘 것이 아니라 조사대상자에게 조사 진행과정을 성실히 알려주는 것이 옳다는 지적도 있다. 특정인이 조사대상자로 선정되고 일정 수준의 조사가 이뤄지면 심사와 판정에 앞서 그 내용을 당사자에게 통보함으로써 반론이나 반박자료를 낼 수 있는 기회를 최대한 보장하자는 것이다.

이상록기자 myzoda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