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들어가며
역사적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려는 수구기득권 언론의 처절한 몸부림에 연민의 정마저 느끼게 된다.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이라는 암울했던 한국 근현대사를 살아온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그 시대 가족의 아픔이란 있게 마련이다.
현재 터무니없는 주장으로 저와 제 가족을 폄하시키고 있는 조선일보의 가계도 결코 명쾌하지 않다는 것은 기자 여러분들이 더 잘 아시지 않는가?
스스로를 일등신문이라고 내세우는 조선일보가 불행한 가계사로 인해 비록 자식이라 하더라도 호적에조차 올라있지 않고 수십 년 동안 교류가 끊겼던 사람의 불확실한 기억을 가지고 확실한 증거도 없이 익명의 뒤에 숨어서 저와 제 가족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은 정론직필이라는 언론의 책임을 저버리는 것이다.
일제시대 부끄러운 과거사의 잔재를 청산하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자 하는 일련의 작업들이 가슴 아픈 제 가족의 역사를 이토록 처참하게 매도시키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과거의 잘못보다 더 나쁜 것은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들의 과거 친일행위가 드러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오히려 일제를 피해 옮겨다녀야 했던 불우한 독립운동가 가족사를 매도함으로써 친일역사청산을 주도하는 특정인물 죽이기에 앞장서는 조선일보의 작태는 대단히 정략적이고 반역사적인 것이다.
지금 이 싸움은 개인 김희선과 조선일보의 싸움이 아닌 한 줌도 안되는 친일 잔존세력과 우리 민족의 부끄러운 역사를 바로잡고 새로운 미래를 나아가려는 4700만 국민의 싸움이라고 감히 단정한다.
저는 조선일보의 이런 터무니없는 음해와 중상모략에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이며 국민의 염원인 역사 바로세우기를 향해 한 치의 흔들림없이 전진해 나갈 것이다.
II. 참가자 소개
오늘 이 자리에는 조선일보의 터무니없는 주장에 대해 직접 해명하기 위해 '월간조선'과 인터뷰를 하셨던 당사자이신 전봉애 여사와 전봉애 여사의 딸인 김정희씨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
전봉애 여사는 지난번 '월간조선'과 인터뷰를 하고난 후 친척들과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남편 김일현이 안동김씨가 아니고 의성김씨임을 알았으며 이에 '월간조선' 오동룡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지난번 인터뷰 내용은 잘못된 것이니 보도하지 마라. 만약 보도할 경우 이에 대해 다른 조치를 취할 것이다"며 분명하게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오동룡 기자는 전봉애 여사가 사실과 다른 인터뷰 내용이므로 보도하지 말아달라는 요구를 묵살하였고, 이에 전봉애 여사는 '월간조선'에서 본인이 하신 인터뷰가 사실과 다르다는 입장을 밝히기 위해 이 자리에 참석하시고 계시다.
다음으로 저의 둘째 셋째 작은아버지인 김일건과 김일룡이 자리하였고 첫째 작은아버지의 부인이신 이경실 여사가 자리하셨다.
그리고 아버지의 활동을 입증하기 위해 아버지 김일련의 한독당 동지였던 김은석옹이 자리하셨고, 작은할아버지 김학규장군의 아들 김일진과 큰아버지 김일선의 호적에 올려져 있는 제 친동생 김광희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
III. 월간조선 보도에 대한 입장 발표
III-1. 김성범과 김학규가 친형제라는 근거
①이 자리에 계신 김학규장군의 아들 김일진에 따르면 , 증조모 선우순이 재가할 당시 안동김씨 김기섭은 본처와의 사이에서 2남과 2녀를 두고 있었으며, 김학규 장군의 '규'자가 김기섭의 본처 소생인 인규와 석규가 사용하는 안동 김씨집안의 돌림자 '홀 규(圭)'가 아니라, 의성김씨에서 사용되는 '별이름 규(奎)자'라는 사실이 김학규가 의성김씨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첨부1 : 김학규장균 제적등본)
②김성범의 장녀 김일신이 생전 작성한 회고록에 따르면 1910년 12월 김성범의 일가 (김성범, 오병희, 김일선, 선우순)가 만주로 이동했을때 김학규가 안동김씨 형제들과 함께 잇지 않고 의성김씨 김성범을 따라 이동했다는 사실이 두 사람이 친형제간이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첨부2 : 김일신 회고록)
③김성범의 아들 일선(一銑), 일련(一鍊), 일호(一鎬), 일건(一鍵), 일룡(아명 :일갑 '一岬')과 김학규의 아들 일진(一鎭)이 모두 의성 김씨의 돌림자 '일(一)'자를 사용하고 있으며 쇠금(金)변이 들어 간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김성범과 김학규가 친형제간이었으며, 그 아들들이 같은 집안의 4촌 형제간이라는 점을 증명합니다. (첨부3 : 의성김씨 족보)
④1931(소화6년). 10. 31자 조선일보의 기사에 따르면 "김일선은 국민부외교부장 김학규(金學奎)의 족하로서 소화오년이월에 국민부하야 동명학원의 교사로 잇든중…"이라고 하여 김성범의 장남 일선을 김학규 장군의 조카로 보도하고 있습니다.(첨부4 : 조선일보 신문 사본)
⑤김성범의 5남인 김일룡의 결혼식때 김학규장군과 그의 처 오광심, 아들 일진이 함께 찍은 가족사진과 김학규 장군의 장례식때 나이 어린 김학규의 아들 일진을 대신 김성범의 장남인 김일선이 상주역할을 하면서 장례식장에서 오광심, 일진과 함께 찍은 사진등이 김학규 장군과 김성범의 자식들이 친족관계에 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첨부5 : 김일룡 결혼식 사진, 첨부6: 김학규 장례식 사진)
⑥이 자리에 계신 한국광복군 제3지대 출신 김은석 옹에 따르면 1956~57년경 주화대표단(駐華代表團)으로 활동하던 중 김학규 장군의 비서격이었던 한독당 조직부차장 이시찬 선생이 김성범의 차남인 김일련을 소개하면서 "한국에서 돌아왔다, 서로 알고 지내라. 백파 김학규 장군의 조카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첨부7 : 김은석 옹의 공적조서)
⑦이 자리에 계신 김학규장군의 아들 김일진에 따르면, 아버지 김학규와 김성범이 친형제 간임은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들어 알고 있는데 늘그막에 김일진을 출산하신 김학규장군은 나이 어린 아들 걱정이 되셨는지 늘 김일진에게 ‘내가 죽으면 일선이가 너를 돌보아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곤 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연유로 김일진은 어린시절부터 김성범의 장남인 김일선 형님댁을 자주 왕래하였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⑧또한 김일진에 따르면, 어린 시절 아버지 김학규장군이 사촌형님들과 달리 김일진이 안동 김씨인지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그것은 김학규 장군의 어머니 선우순이 부군인 김순옥이 돌아가신후 몸이 아파서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 김성범 형님이 고장에서 유명한 홀아비 한의사였던 안동 김씨 김기섭을 찾아가 어머니가 치료를 받고 몸이 나아지면 안동 김씨와 같이 살기로 하였고 그런 연유로 김성범 형님은 나이가 있어 이미 의성 김씨 집안에 올려져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 김학규만이 안동김씨 호적에 올렸다고 들었다고 합니다.
⑨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참석하고 계신 김성범의 4남 일건, 5남 일룡과 3남 일호의 처인 이경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김학규 장군의 아들인 일진 김성범과 김학규가 친형제라는 것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⑩의성김씨 족보에 김순옥의 사망시기가 1897년이고 김학규의 출생이 호적상 1900년으로 기재되어 있는 부분은 저도 정확히 알지 못하나 그 당시 족보든 호적이든 정확한 것이 있겠는가? 다만 김혁규의 자서전에 김학규가 장형인 김성범과 15년 터울로 나타나 있고 의성김씨 족보에 김성범이 고종임년(1882년)생이므로 김학규가 1897년 경에 출생하셨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김성범의 2녀 김일신의 회고록에 1910년 가족들이 만주로 이동할 당시 김학규가 13살이었다는 기록이 부분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III-2. 김일련이 독립군이라는 근거
①작은 아버지 일건의 증언
이 자리에 계신 작은 아버지 김일건에 따르면, 형님 김일련은 10대시절부터 만주 봉천 유하현 산원포에 최초로 정착하여 땅을 일구면서 독립운동가들의 부족한 식량을 해결해 주었고 독립군을 조직하고 훈련시켰던 아버지 김성범을 따라 다니면서 일을 도와드렸고, 1936년 아버지가 돌아 가시자 아버지 뒤를 이어 농사를 지으면서 계속해서 작은 아버지 김학규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해방 후에도 형님은 한독당 특별당원으로 작은 아버지 김학규와 함께 활동했으며, 한국으로 들어오신 후에 일련 형님은 한독당의 특명으로 정보 수집차 상인을 가장하고 자주 중국땅을 내왕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김철수라는 분과 함께 중국 대련의 한 여관에서 투숙하던 중 형님 일행을 수상히 여긴 여관 종업원이 소련군에 밀고를 하여 체포되었고, 형님이 체포되던 당시에 남한의 거물급 간첩을 체포했다며 시가행진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후 일련형님은 정치범이 되어 시베리아 땅의 형무소로 갔다고 합니다. 작은 아버지 김일건은 형님 김일련의 행방에 대해 김학규 작은 아버지에게 들었다고 합니다.
또한 한국전쟁 중에 포로로 잡혔다가 1954년 집으로 돌아온 김일건 작은아버지는 집에 도착하니까 어머니 오병희가 일련 형님이 베르호얀스크에서 보낸 엽서를 보여주셨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눈물을 글썽이시면서 형무소에 들어가면 나오기 힘들다며 형님의 엽서를 당신께서 가지고 계시다가 복자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②김일련의 한독당 동지인 김은석옹의 증언
이 자리에 계신 김은석옹에 따르면, 1946~47년경에 해군대위 출신의 신某가 동북 주화대표단 총 반사처에 들어와서 활동을 하였는데 얼마후 병으로 사망하자 곧바로 김일련(당시 가명:김평우)이 주화대표단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병사한 신某씨의 임무를 대신하러 왔음을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김학규장군의 비서였던 조직부차장 이시찬선생은 김일련을 소개하면서 "한국에서 들어왔다. 서로 알고 지내라. 백파 김학규장군의 조카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 후 김은석옹은 김일련이 서상욱이라는 사람과 함께 지령을 받고 봉천으로 왔고 무슨 임무인지는 모르나 그 임무를 다 마치고 귀국하던 중에 영구나 대련에서 잡혔으며, 소련 쪽으로 붙들려 갔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합니다.
③김희선의 아버지 김일련에 대한 기억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으나, 제 아명이 복자(福者)로 된 것이 아버지와 관련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태어나던 1943년 아버지 김일련을 비롯하여 저희 가족이 살고 있던 만주 봉천의 동네 사람들이 일본 수사들과 헌병들에 의해 잡혀가 모진 고문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 당시 어머니 뱃속에 있던 저를 두고 동네사람들이 '뱃속에 있는 이 아이가 복(福)이 있으면 일련이와 동네 사람들이 풀려날 것이다'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제가 태어나고 난 후 아버지와 동네 사람들이 풀려나자 '복이 있는 아이다'라 하여 복자(福子)라고 하였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