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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이 있는 편지]여성의 사랑과 남성의 사랑

입력 | 2004-09-17 16:48:00


정이현 작가님, 공들여 쓴 편지, 고맙습니다. 실로 오랜만에 계절 소식으로 시작하는 편지를 받아보는군요. 문체는 다르지만 나도 열 살 전후해서 비슷한 편지를 쓴 적이 있습니다. ‘부주전상서(父主前上書)’, 그리고는 곧바로 계절소식으로 이어지는 정형문이지요.

얼마 전에 정 작가와 동갑내기인 심윤경 작가의 장편소설, ‘달의 제전’에서 비슷한 옛 편지글을 접하고 얼마나 기쁘고 기특한 마음이었는지 모릅니다. ‘한마님전 상살이. 만춘(晩春)은 가량(佳良)이라 수일(數日) 일기 청화(청和)하옵고.’

‘춘향의 치맛자락’ 이야기는 ‘도발적인 글쓰기’로 명성을 쌓고 있는 정 작가다운 문제 제기입니다. 그러나 정 작가의 ‘발칙한 의심’은 춘향을 먼저 만난 세대에게는 아주 낯설지는 않습니다.

1960년대 중반에 치른 ‘대학국어’의 기말시험 문제로 기억합니다.

‘춘향전의 여주인공의 성격을 논하라.’

아직 민중사적 해석론이나 장경학의 ‘법률 춘향전’이 등장하기 전이라 ‘열녀춘향’이 모범답안이었지요.

그런데 그 모범답안 대신 ‘역시 기생의 딸이다’라는 요지를 쓴 동급생이 있었습니다. 그의 파격적인 용기가 부러웠지요. 춘향의 ‘동기불순’은 공공연한 의심이었지만 차마 답안지에는 내놓고 쓸 수가 없었어요.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모든 시의 구절구절마다 ‘올바른’ 해석이 있었지요. 조선시대 사대부의 글 속에서 ‘님’은 무조건 임금이다. 한용운의 ‘님’과 이상화의 ‘침실’은 절대로 ‘연인’과 ‘더블베드’가 아니다 등 등. 그러나 답은 답대로 썼지만 가슴 답답한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지요.

민족의 고전, ‘춘향전’도 텔레비전 드라마 ‘파리의 연인’도 분명히 남녀간의 사랑이야기지요. 그러니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지요. 남녀간의 사랑이야기는 배경이 되는 사상적 상황이 다를 뿐 본질은 언제나 마찬가지, 즉 사내는 예비 강간범, 계집은 매춘부라는 이론도 있지요. ‘남자의 면상은 이력서, 여자의 얼굴은 청구서’라고도 하지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작품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예수의 마지막 유혹’ (1998)에 이런 대사가 있더군요. “세상에 여자는 단 하나뿐이다. 얼굴과 몸뚱이는 달라도 모두가 같은 사람이다. 한 여자가 당신을 떠나면 누군가 다른 육신으로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천사가 예수에게 전하는 ‘하느님’의 말이지요. 심오한 종교적 해석일랑 덮어주고 이 말에 보란 듯이 힘을 받을 사내가 무수할 겁니다.

황석영의 ‘심청’은 또 어떤가요? 자신의 성을 자산으로 삼아 한 세계를 이루어내는 심청의 득의양양한 재생을 통해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일까요?

이 땅은 여전히 사내들의 천국입니다. 그러기에 여성의 사회적 삶은 고달프기 짝이 없습니다.

정 작가님, 어린 여아 시절에 예쁘다고 뽀뽀와 사탕을 함께 받은 적은 없나요?

자신의 몸이 재산이 된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이미 여성의 ‘불행’은 예정된 것이라는 게 우리 세대의 윤리였습니다. 그러나 요즘처럼 여성의 몸에 대한 자각을 부르짖는 강한 페미니즘의 시대에는 미에 대한 자각이 당당한 자부심으로 승격되지 않을까요?

교육적인 만화영화라는 ‘슈렉2’는 가장 현실성 없는 동화일 뿐입니다. 영화처럼 마음이 착한 괴물과 결혼하겠다는 이 땅의 소녀가 과연 몇이나 있을까요? 자신이 보유한 자산의 효용을 극대화함으로써 신분상승과 이윤 극대화를 꾀하는 것은 경제학과 경영학으로 상징되는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보편적 윤리는 아닌가요? 그래서 더욱 답답합니다.

며칠동안 내린 비가 가을을 재촉합니다. 이 가을이 무르익기 전에 정 작가께 되돌리고 싶은 질문이 있습니다. 여성의 사랑과 남성의 사랑이 어떻게 달라야 하는지요, 아니면 달라서는 안 되는 것인지요?

안경환 서울대 법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