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 급여를 두 달째 못주고 있다. 은행 말로는 매출 50억원 이상이면 신용대출도 가능하다는데 그건 그림의 떡이다.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월 10% 이상 고리(高利)를 주고 겨우 버텨나가고 있다.”(서울 서초구 네트워크 장비 생산업체 A사 박모 사장)
“하루 5, 6개 중소업체들을 방문하지만 돈을 쓰겠다고 하는 곳이 없다. 돈 좀 써달라고 통사정해도 손사래만 친다. ‘갑과 을’이 완전히 바뀌었다.”(우리은행 동수원지점 김병웅 차장)
중소기업간 자금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다. 추석을 앞두고 은행들은 중기 자금난 해소를 위해 수천억원씩 추석 특별 지원자금을 쌓아뒀다고 하지만 정작 이들이 찾아가는 곳은 담보 있고 여력 있는 업체들이다.
그러나 경기침체가 지속되면서 상당수 내수형 중소업체들은 ‘돈 가뭄’에 시달리고 있다.
▽‘돈 가뭄에 목 탄다’=경기 안산시 시화공단의 W금속은 낙석 방지 공사에 주로 쓰이는 알루미늄 펜스 와이어 제조업체다.
이 회사 김모 사장은 “은행은 어음을 할인하더라도 적금이나 예금을 담보로 잡는다”며 “가진 것 없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은행 문턱은 너무 높다”고 하소연했다.
서울 서초구 A사의 박 사장은 “모기업의 구매 발주서류만 있으면 은행에서 바로 대출해주는 네트워크론도 모기업이 가입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은행이 추석자금을 빌려준다지만 십중팔구 담보나 신용보증기금 보증서를 요구한다. 지자체 지원자금도 보증서가 없으면 배정을 못 받는데 보증서 따기가 수월한 줄 아느냐”고 반문했다.
경기 평택시의 유화제품 운반용 포장업체 J사 이모 경리부장은 “원부자재 값이 작년 말 대비 30∼40% 올랐지만 납품단가는 변한 게 없다. 원재료는 현금을 주고 사 쓰고, 납품대금은 어음으로 받아 직원 월급만 4개월째 밀렸다”고 털어놨다.
▽‘투자 안 해서 여력있는 것’=인천 남동공단의 절삭공구업체 H다이아몬드 Y모 차장은 이달 들어서만 은행 3, 4곳에서 ‘돈을 조금이라도 써 달라’고 요청했지만 모두 거절했다고 귀띔했다.
그는 “올해 계획한 설비투자를 보류하면서 자금사정에 약간 숨통이 트였을 뿐 넉넉한 것은 아니다”며 “경기가 불투명할 때는 은행돈 안 쓰는 게 최선”이라고 말했다.
중국에서 의류제품 임가공 사업을 하는 G사의 K 부장도 “그나마 중국 현지 사업이 잘돼 버티고 있다”며 “국내 경기가 나아질 때까지는 은행 돈 빌려 무모하게 투자할 계획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비올 때 우산 뺏는 게 은행’=우리은행 동수원지점 김 차장은 “영업점 마진율 1.5%포인트를 포기하고 대출세일에 나섰지만 현상유지도 어렵다”고 털어놨다.
우리은행 유성근 성수동지점장은 “땅값이 많이 오른 서울 성동구의 경우 공장 부지를 팔아 대출금을 갚고 경기 하남시 등 수도권 외곽으로 이전하는 업체들이 많다”며 대출영업의 어려움을 하소연했다.
한 시중은행 대출심사 직원은 “대출 늘리는 것보다 연체율 줄이는 게 현안인데 위험을 감수하고 신규 기업 발굴에 나서겠느냐”며 “추석자금도 담보나 보증서가 없으면 그림의 떡”이라고 말했다.
그는 중소기업 자금난 해소 명목으로 5월부터 8000억원을 배정해 두고 있지만 실제 지원된 자금은 1000억원도 안된다고 덧붙였다.
다른 시중은행의 한 임원은 “매정한 소리로 들리겠지만 ‘비올 때 우산 뺏고, 햇볕 쨍쨍할 때 우산 권하는 게 은행 대출의 속성’”이라고 말했다.
이강운기자 kwoon90@donga.com
이철용기자 lc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