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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1939년 ‘갑신정변’ 박영효 사망

입력 | 2004-09-20 18:43:00


65년 전 오늘, 조선조 말기 개화당의 태두 박영효(朴泳孝·1861∼1939)가 세상을 떠났다.

조선말기 노론 세도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열세 살 때, 철종의 딸 영혜옹주와 결혼해 왕의 사위가 된다. 그러나 석 달 만에 상처(喪妻)했다. 왕의 인척이었으나 시대의 풍운아가 되어야 했던 삶의 전조였을까.

일찍이 개화사상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스물한 살 때, 일본에 수신사로 건너가 한 달 동안 일본을 돌아보면서 메이지유신으로 서구화된 일본에 압도된다. 조국 조선의 개혁과 개방에 앞장설 것을 결심한 것이 그 즈음. 그리하여 마침내 스물세 살에 쿠데타(갑신정변)를 감행한다.

혁명은 3일천하로 끝났다. 그와 동지들의 인품과 의도는 훌륭했지만 실력이 모자랐다. 이상은 높았지만 경험이 없었고 너무 젊었다. 그들은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배척하고 능력과 경험이 많은 선배들을 요즘 식으로 ‘수구꼴통’이라고 몰아붙였다.

그는 일본에서 10년을 은둔하다 갑오개혁으로 시대가 바뀌면서 귀국한다. 보다 확실한 친일 정권을 확보하기 위해 일본이 그를 불러 들였다. 하지만 그는 일본이 아닌 조국 조선을 위해 일했다. 이듬해 반역 음모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망명길에 오른 것은 일본인들의 음모라는 이야기까지 있었다. 두 번째 망명은 무려 12년.

그는 인생의 정점일 나이에 이국에서 낭인으로 살았다. 끓는 피는 어쩔 수 없었던지 고베에서 쿠데타 기도가 발각되어 궐석재판으로 교수형까지 선고받았다. 1907년 6월 초에야 귀국하지만 신산한 삶은 이어졌다. 보안법 위반 죄목으로 제주도에서 1년 유배 생활을 했으며 서울 상경은 금지됐다. 마흔아홉 살 때 마산에서 한일병합을 맞았다.

병합 이후 그는 명성과 부를 함께 누렸다. 중추원 고문, 일본 귀족원 의원도 지내고 작위(후작·侯爵)를 받았다. 조국 조선이 결국 쓰러지고 일본 시민이 되어버린 노 혁명가의 감회는 어땠을까? 말년에 찾아 온 그의 영화(榮華)는 혁명의 실패와 긴 망명, 유배, 암살 위협으로 시달리던 젊은 날을 통과하면서 삶이란,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깨달은 ‘인정’과 ‘받아들임’의 보답이었을까?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