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남녀의 상처와 치유를 그린 김기덕 감독의 11번째 영화 ‘빈집’. -사진제공 영화인
김기덕 감독의 신작 ‘빈집’을 보고 나서 복잡하고 그럴싸한 해석을 늘어놓고 싶은 욕구를 느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빈집’은 갖가지 해석과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그의 기존 영화에 비해 무척 심플하다. 이 영화는 단도직입으로 쉽게 접근할 때 제대로 읽힌다.
주인이 비운 집들을 전전하며 사는 태석(재희)은 한 집에서 멍투성이의 여자를 만난다. 선화(이승연)는 남편의 소유욕에 억눌려 유령처럼 사는 여자. 태석은 선화를 구해 도망치고, 두 사람은 빈집을 돌아다니며 산다. 어느 날 둘은 무단 가택 침입죄로 경찰에 붙잡힌다. 선화는 남편에게 끌려가고 태석은 옥살이를 한다. 태석은 남의 눈에 띄지 않으면서 같은 공간에 살 수 있는 ‘유령연습’을 연마한 뒤 출소해 선화를 찾는다. 태석과 선화, 그리고 남편의 특별한 동거가 시작된다.
‘빈집’은 회화적이다. 태석은 말이 일절 없으며, 선화는 “식사하세요” “사랑해요” 단 두 마디(비명소리 “아악!”을 합하면 세 마디)만 한다. 이 영화는 장면과 장면을 연쇄된 그림처럼 늘어놓는 ‘이미지 영화’이면서도, 아주 조곤조곤하고 친절하게 내러티브를 전개해 나간다. 김 감독은 이번엔 특정한 장면에 강렬한 욕망을 쏟아 붓기보다는 이미지와 이미지가 연쇄반응을 일으키면서 이야기가 편안하게 전달되도록 하는데 더 관심이 많은 것 같다.
김 감독의 화두인 ‘상처’와 ‘치유’는 이 영화에서 ‘유령’이란 개념을 통해 제시된다. 빈집만 찾는 태석이나 제 집에 살아도 존재감이 없는 선화는 모두 ‘있되 있지 않은’ 유령과 다름없다. 이들은 들르는 빈집에서 자신들의 사진을 찍어 남김으로써 존재감을 회복하고, 서로를 사랑함으로써 서로를 치유한다. 태석은 3번 아이언 골프채(이 영화의 영어제목은 ‘3 iron’이다)를 휘두르며 선화와 자신을 괴롭힌 남자들을 ‘응징’하는 데, 골퍼들이 거의 쓰지 않는,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3번 아이언은 태석과 선화의 상징물이다.
영화는 계속된 질문을 낳는다. 왜 대사를 없앴을까? 왜 태석과 선화가 저울에 함께 오른 라스트 신에서 저울은 ‘0’을 가리킬까?
하지만 김 감독의 영화를 꿰뚫어 보는 가장 효과적인 질문법은 ‘왜(Why)?’가 아니다. 바로 질문 자체를 거꾸로 뒤집어,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If not)?’ 하고 물어보는 것이다.
질문하자. 만약 인물들의 대사가 많았다면? 단순해서 미적(美的)인 이 영화가 조잡해졌을 것이다. 저울이 ‘0’을 가리키지 않았다면? 태석과 선화가 ‘유령’이 아니란 뜻이므로 판타지와 상징의 부피감이 확 쪼그라들었을 것이다.
‘빈집’은 김 감독의 전작 ‘사마리아’에서처럼 별난 상황이 웃게 만든다. 예를 들면, 선화가 주인이 버젓이 있는 한옥에 공손히 들어가 소파에 몸을 누이고 단아하게 낮잠을 자는 것 같은 대목 말이다. 이런 ‘뜬금없음’은 김기덕 유머의 본질인데, 이는 사건 자체의 논리성이 아니라 인물 속에 숨어 있는 욕망의 논리성을 따라갈 때 이해된다. 그들은 뻔뻔하지만, 사실은 그들 마음의 논리적 명령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빈집’에서 분명한 건 김 감독이 더 정돈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더 불편함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으나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김 감독은 여전히 대단하다. 그의 말대로 이런 “소박한” 멜로드라마를 둘러싸고도 ‘논란이 없는 게 또 다른 논란이 될’ 듯한 징조를 보이고 있으니 말이다. 올해 베니스국제영화제 감독상 수상작. 10월 15일 개봉.
이승재기자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