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어느 날.
프랑스 내 한 미군 기지를 방문한 당시 유럽 주둔 미군 총사령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장병들을 상대로 연설을 마친 뒤 연단을 떠나다가 진흙탕에 미끄러져 넘어졌다. 한 순간 당황했던 아이젠하워는 참모장 월터 스미스 소장이 달려와 무언가 귀엣말을 하자 바로 연단으로 돌아가 마이크를 잡았다.
“여러분이 즐겁다면 나는 다시 한번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결국 장병들의 환호 속에 곤경에서 벗어난 아이젠하워는 나중에 회고록을 통해 스미스 소장의 빛나는 조언은 항상 ‘반걸음’ 떨어져 보스인 자신을 지켜본 결과라고 평가했다. 스미스 소장의 ‘반걸음 참모론’은 현재 미 육군의 전범(典範)이 돼 있다.(장명순 ‘바람직한 참모상’)
한국 정치의 가장 큰 비극의 하나는 이런 멋진 참모상을 좀처럼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최소한 보스와 참모가 ‘대등한 파트너’라는 사고가 전제되지 않는 한 ‘보스보다 뛰어난 참모’는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알아서 기는’ 행태가 일반화돼 있는 한국의 정치 풍토에서 왕조시대 이래 직언(直言)이 참모의 최대의 덕목이 돼 온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토론공화국’과 ‘탈(脫)권위’라는 구호에도 불구하고
직언의 수위에 관한한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정부는 역대 정권 가운데 가장 낮은 점수를 받을 가능성이 큰 것 같다. 우선 직언에 대한 노 대통령의 수용성 문제를 지적하는 소리가 많다.
현 정부 들어 청와대에서 일했던 전직 고위 관계자들은 “대통령이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 의견을 내면 짜증을 내는 편이다”고 종종 말한다. 한 관계자도 최근 “노 대통령은 자신이 납득하지 않으면 온 세상이 뭐라 해도 듣지 않는 스타일”이라고 평했다.
실제 노 대통령은 올해 1월 초 장차관급 인사 110명이 참석한 국정토론회에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심사숙고 끝에 결정을 내렸는데 때로 장관한테서, 수석비서관한테서 비판을 들을 때면 난감하다”고 말했다. 참모들의 비판을 원천 차단하는 얘기로 들릴 만한 발언이었다.
이런 노 대통령의 스타일 탓인지, 당-정-청에 걸쳐 직언의 부재는 최근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5일 노 대통령이 방송토론회에서 국가보안법 폐지 발언을 한 이후 열린우리당 이부영(李富榮) 의장, 천정배(千正培) 원내대표, 이해찬(李海瓚) 국무총리, 정동영(鄭東泳) 통일부 장관 등이 국보법 폐지에 힘을 싣는 발언을 앞 다투어 하는 것을 보며 걱정이 들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국보법 폐지 대신 개정을 주장해 온 한 의원은 노 대통령의 발언 직후 “머리가 띵하다”고 말했다. 그만큼 대통령의 한마디에 급전직하로 바뀐 당의 분위기는 마치 ‘브레이크 없는 개혁열차’를 보는 듯한 착각을 안겨 준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들어 ‘개혁속도 조절론’이나 ‘민생우선론’이 여권 내에서 실종된 양상을 두고 “대통령 코드 맞추기가 아니냐”는 비판이 적지 않다. 그러면서도 “이건 아닌데…”라는 뒷말은 각료들의 입에서조차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보스의 한마디에 앞으로 내달리는 것은 잘해야 전위대(前衛隊)의 역할일 뿐이다. 권력 내부에서 직언과 비판의 기능이 실종되면 대체로 그것이 바로 적신호인 경우가 많다.
이동관 정치부장 dk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