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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경남]동서남북/시장에 혼나야 움직이는 공무원

입력 | 2004-09-22 21:28:00


7월말경 울산시청 기획관실로 울산대 대학원생 한명이 찾아왔다. 그는 쭈뼛거리며 ‘울산 중구지역 상권 활성화 방안’이란 제목의 논문 한편을 내놓았다.

그를 포함한 대학원생 6명과 H교수 등이 “전문지식을 활용해 울산발전을 위한 정책을 제시해보자”며 3월부터 4개월간 200여만원을 들여 만든 논문이었다.

마침 울산시는 시정발전을 위해 시민 아이디어를 공모하는 ‘시민창안제도’를 시행하고 있었다.

이 논문은 ‘현장조사를 통해 울산의 현안인 중구의 상권 활성화 정책에 대한 제언을 충실히 담고 있다’는 호평을 동료교수들로부터 받았다. 때문에 H교수는 시청에서도 고맙게 받아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담당자는 제목을 보고는 “특정 지역에 국한된 논문”이라며 H교수에게 반송했다.

H교수는 다시 “울산 전체에 적용될 수 있는 정책”이라고 설명했고, 담당자가 논문을 받겠다는 뜻을 밝혀 8월초 다시 논문을 제출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시청과 중구청이 서로 “우리 소관이 아니다”며 떠넘기기만 했다.

H교수는 ‘지역 발전’을 위한 순수한 동기에서 연구비 한 푼 안받고 열심히 만든 논문이 시청에 접수조차 되지 못하고 홀대를 받자 최근 박맹우 시장을 만나 자초지종을 털어놨다.

박 시장은 “금시초문”이라며 담당자를 불러 질타했다. 그 때서야 논문이 정식 접수됐다.

한달 보름간 논문을 들고 시청과 구청을 드나들었던 대학원생은 “말로만 듣던 ‘행정편의주의’, ‘관료주의’란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고 꼬집었다.

비슷한 사례는 또 있다. 북구청이 2001년 11월부터 추진한 음식물쓰레기 처리시설 건립을 놓고 주민들과 첨예하게 대립하며 공사가 중단됐다. 꼭 필요한 시설이지만 시는 “구청 업무”라며 팔짱만 끼고 있다.

최근 울산시 간부 공무원들은 시정혁신을 주제로 워크숍을 가졌다. 프로그램의 하나로 ‘울산이 빨리 망하는 법’을 주제로 한 토론도 있었다. 공무원들은 ‘공무원들의 경직된 사고와 창의적 사업발굴에 인색한 경우’를 빨리 망하는 법의 하나로 꼽았다고 한다.

공무원들이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알면서도 고치지 않는 것, 그게 더 큰 문제가 아닐까.

정재락기자 rak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