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없이 국민을 겁주는 사람들이 있다. 요즘 예를 들면 ‘당장 나라가 망할 것 같다’고 목청을 높이는 이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물론 그들은 나름대로 나라와 국민을 위한 우려이자 충정 때문에 그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나 같은 심약한 사람으로선 덜컥 겁부터 난다.
▼교육… 경제… 핵… 곳곳 아우성▼
글을 쓰다 보면 자아도취가 되어 점점 표현 강도가 높아질 때가 있다. 그 글이 소설이거나 시일 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아도취가 예술적 향기를 풍길 때 그것은 명작이 된다. 그런데 객관성과 사실성을 전제로 한 저널리스트의 글은 사회적 책임을 담보로 하고 있다. 선택적으로 읽는 문학작품과 사회 현안에 대한 공론을 위한 글이 어찌 같은 성격일 수 있겠는가.
자기주장이 난무하는 무책임한 저널리즘은 ‘불안’이라는 치명적인 병을 확산시킨다. 불안은 정신과 질환의 일종이다. 불안은 앞으로 닥칠 위험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미래의 가능성으로 존재하고 있어 안전이 깨질 것이라는 두려운 감정을 뜻한다. 불안해지면 심장의 박동이 세지고 가슴이 답답해지며 머리가 무겁고 식은땀이 난다. 아침 신문을 읽으며 그런 증세를 느낄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아무튼 그런 유의 글을 접하면서 하루를 시작하기는 정말 싫다.
불안이라는 증세가 모두 나쁜 것만은 아닌가 보다. 얼마 전 텔레비전을 보니 올림픽에서 큰 성과를 올린 선수들 중에 불안체감지수가 높은 선수들이 많다고 한다. 사람마다 불안에 대한 반응수치가 다른데, 양궁이나 사격 같은 정신 집중이 필요한 선수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불안지수가 낮았지만, 레슬링이나 유도 같은 과격한 경기에서는 불안으로부터 유도되는 파격적인 에너지가 큰 도움이 된다는 분석이다.
불안에는 개인적 불안이 있고 사회적 불안이 있다. 한국은 땅 면적에 비해 인구밀도가 높은 반도국가다. 말이 좋아 반도국이지 삼면이 바다고 위는 휴전선으로 막혀 있으니 섬과 다를 게 없다. 이런 특수한 상황 탓에 큰 사건이든 작은 사건이든 그 여파가 강하고 빠르다. 마치 냄비에 콩알을 집어넣고 뚜껑을 닫은 다음 화덕에 올려놓은 것처럼, 시도 때도 없이 크고 작은 사건들이 튀어 오른다. 워낙 사회적 반응이 민감한 곳에 살다 보니 한국 사회의 불안체감지수 또한 높을 수밖에 없다.
요즘은 신문을 들춰보기가 정말 겁이 난다. 교육정책은 서로 엇갈려 아우성이고, 경제는 곤두박질을 치고, 생활고를 비관한 자살률은 외환위기 때를 제치고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고 한다. 유가는 치솟고, 남의 나라 전쟁에 끼어들어 우리까지 테러를 걱정해야 할 상황에, 중국은 멀쩡하게 잘 있던 고구려 역사를 자기 나라 거라며 집적거리지를 않나, 핵을 둘러싼 주변 정세 또한 심상치 않다. 이런 마당에 사람들은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찢어져 있고, 그 중간에 선 자들은 양비론자라며 양쪽에서 욕을 얻어먹고 있다.
▼불안은 불안을 파급시켜▼
아무리 둘러봐도 주위가 온통 살얼음판 같다. 과연 우리는 그토록 최악의 시나리오 속에서 기적처럼 생존하고 있는 것일까. 두려움에는 두려움을 일으키는 위험물이 목전에 있지만, 불안에는 그런 것이 없다. 그러므로 불안은 상상된 위험물에 대한 반응이고 주관적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불안의 대상은 무(無)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현재 감당하고 있는 불안의 실체는 무엇인가.
과거 사이비 종교가 교세 확장을 위해 자주 써 먹던 것이 바로 종말론이었다. 몇 차례 큰 사회문제로까지 대두되기도 했는데 결국 망한 것은 세상이 아니라 종말론을 주장하던 그 신흥종교였다. 불안은 불안을 파급시킨다. ‘이러다 망한다’는 소리가 나온 게 어디 어제오늘의 일인가. 그런 식으로 말하자면 벌써 열두 번도 넘게 망했어야 할 나라가 우리나라다. 그런데 아직 건재하고 있으니 참 이상한 나라 아닌가.
김미진 객원논설위원·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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