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를 많이 먹으면 혈관에 이물질이 쌓여 심장병에 걸리기 쉽다. 하지만 기름진 음식을 즐기는 프랑스인들은 심장병에 잘 안 걸린다. ‘프렌치 패러독스(French Paradox)’라 불리는 이 현상은 프랑스인들이 식사 때마다 마시는 한두 잔의 적포도주 덕분이라고 짐작돼 왔다.
최근 프랑스 루이 파스퇴르대의 옥민호 박사(30·사진)가 이 패러독스를 말끔히 풀어냈다. 옥 박사 연구팀은 적포도주에 포함된 ‘폴리페놀’이란 물질이 동맥의 혈관이 막히는 증상(동맥경화)을 원천적으로 막는다는 점을 밝혔다.
정상적인 혈관벽은 매끈하기 때문에 이물질이 좀처럼 달라붙을 수 없다. 하지만 지방의 일종인 콜레스테롤이 많아지면 상황이 달라진다. 콜레스테롤을 잡아먹은 체내 대식세포가 혈관벽 안쪽에 쌓여 덩어리를 형성하고, 여기에 혈액이 부딪혀 상처가 생긴다. 이 상처를 치료하느라 혈소판 등이 달라붙어(혈전) 동맥경화가 발생한다.
연구팀은 대식세포가 주변에 새롭게 생성된 작은 혈관을 통해 영양분을 공급받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 혈관이 만들어질 때 관여하는 단백질은 크게 두 가지, 즉 VEGF와 MM-2다. MM-2는 새로운 혈관이 자리 잡을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세포 사이의 물질(matrix)을 먹어치운다. 이후 VEGF가 나서 혈관이 성장하게 만든다.
옥 박사는 폴리페놀이 이 두 단백질의 기능을 억제시킨다는 내용의 연구논문을 2년에 걸쳐 발표했다. MM-2에 대한 논문은 미국 심장학회가 발행하는 ‘서큘레이션(Circulation)’ 28일자에 게재될 예정이며, VEGF 연구는 관련 전문지에 지난해에 소개됐다.
옥 박사는 “암세포가 성장하거나 전이할 때에도 새로운 혈관들이 만들어진다”며 “폴리페놀이 항암제 역할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옥 박사는 전남대 약대에서 학사와 석사 과정을 마치고 1999년 벤처회사인 양지화학에 입사했으며, 루이 파스퇴르대 약대에서 공동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지난해 10월 박사학위를 받았다. 다음 달 초 양지화학에 복귀할 예정이다. 그는 “폴리페놀은 한약재나 과일 등에도 흔하게 포함돼 있다”며 “한국의 전통 음식에서 폴리페놀을 찾아내는 연구를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전남대 약대 김경만 교수는 “혈전이 떨어져 나가 뇌, 폐, 심장 주변의 혈관을 막아버리면 급사의 원인이 된다”며 “옥 박사의 연구는 혈관과 관련된 여러 난치병을 근본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김훈기 동아사이언스기자 wolf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