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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1963년 英 ‘데닝 보고서’ 발표

입력 | 2004-09-24 17:48:00


“이 보고서는 베스트셀러가 될 것이다.”

자신의 이름을 딴 보고서 발표를 앞두고 영국의 앨프리드 데닝 판사는 자신 있게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1963년 9월 25일 자정을 기해 공개된 ‘데닝 보고서’는 영국 전역에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10만부 넘는 판매고였다.

데닝 보고서는 1998년 미국 케네스 스타 특별검사가 클린턴-르윈스키 스캔들을 다룬 ‘스타 보고서’의 원조 격. 잘 나가는 정치인과 젊은 여성의 섹스 스캔들을 다뤘다는 점에서 스타 보고서와 비슷했지만 스파이 매춘 자살 등 말초적 흥미를 자아내는 요소는 훨씬 풍부했다.

존 프로퓨모 육군장관. 그는 영국 정계의 ‘스타’였다. 귀족 가문에 옥스퍼드대 출신인 그는 당시 48세의 젊은 나이로 보수당의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였다.

크리스틴 킬러. 그녀는 영국 화류계의 ‘스타’였다. 당시 19세에 불과했던 그녀는 프로퓨모 장관을 비롯한 영국 정재계의 실력자들을 고객으로 거느리고 있었다.

유명 정치인과 고급 콜걸의 염문. 그것은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기는 했지만 의회가 조사에 나설 만한 사건은 아니었다. 그러나 구 주영국 소련대사관 소속 해군무관이 킬러의 애인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섹스 스캔들은 단숨에 국가안보 사건으로 격상됐다. 데닝 보고서는 “군사정보가 소련으로 넘어갔다는 증거는 없다”고 결론지었지만 냉전 논리가 지배하는 여론 재판에서 프로퓨모 장관의 정치 생명은 이미 끝난 후였다.

더욱 치명적이었던 것은 그의 거짓말. 의회에서 “킬러와 ‘부적절한 관계’가 아니었다”고 잡아뗐던 그는 석 달 만에 “국민을 속여서 죄송하다”고 실토했다. 끝까지 그를 감쌌던 보수당 정권은 이듬해 총선에서 대패했다.

정계를 떠난 프로퓨모 전 장관은 40년 넘게 런던 빈민가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며 살고 있다. 그의 봉사활동에 감명 받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어느 날 그를 찾아왔다. “이제 충분히 속죄하신 것 아닙니까.”

그는 대답했다. “비록 세상이 나를 용서해 준다고 해도 나는 거짓말을 한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누가 정치인은 정직할 수 없다고 했는가.

정미경기자 micke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