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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테이트]‘지상의 그집’ 낸 홍윤숙 시인 ‘모녀3대’

입력 | 2004-09-24 18:07:00


한국 현대 시사(詩史)의 여성시인 1세대에 속하는 원로 홍윤숙씨(79)가 시력(詩歷) 57년을 결산하는 열다섯 번째 시집 ‘지상의 그 집’(시와시학사)을 펴냈다.

여로(旅路)가 다해 감을 아는 이의 쓸쓸하되 너그러운 깨달음, 주름 잡힌 것들의 아름다움, 돌연히 바라본 세상의 황홀함을 과장 없이 담담하게 보여주는 커다란 포용과 같은 시집이다. 팔순을 앞둔 그가 남은 격정마저 삭이고 우리 시단과 세상에 건네는 순결한 인사의 느낌을 준다. 서시 ‘위난한 시대의 시인의 변(辯)’은 이런 대목을 지녔다.

“시는 일찍이 내 생을 관통해 간 한 발의 탄환이었고/나는 그로 하여 일생을 앓으며/만신창이로 여기 서 있다/진실로 내 생을 관통한 한 발의 탄환/그 고통과 기쁨의 황홀한 상처”

그의 새 시집 출간을 축하해 주려 딸인 설치미술가 양주혜씨(49), 양씨와 문학평론가 김화영씨(63·고려대 교수) 사이에서 난 손녀 설치미술가 김아린씨(26)가 23일 홍씨의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자택으로 찾아왔다. 김씨는 빨간 맨드라미 속에 연초록 소국을 꽂은 꽃다발을 들고 왔다. 홍 시인은 “불면증이 가시지 않고 올해 들어 기력이 약해진 것 같다. 남은 시들이 있지만 다시 시집을 엮게 될 것 같지 않다”며 편안하게 웃었다. 그러나 양씨는 “어머님은 언제부턴가 늘 ‘이번이 마지막 시집’이라고 하셨어요. 아마 시집 엮기 전에 있는 힘을 다 하시기 때문일 거예요”라며 어머니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양씨는 “지난 번 시집 ‘마지막 공부’는 죽음에 대해 너무 처절하게 쓰신 것 같았어요. 아버지(신학자 양한모·92년 작고)가 돌아가신 충격에서 아직 못 벗어나셨구나, 힘들어하시는구나 싶어 읽다가 많이 울었어요. 하지만 새 시집에선 담담하게 시간을 관조하시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지상의 그 집’에는 정지된 작은 꽃들, 외출 나온 거리 풍경, 빈 항아리, 특히 집의 이미지가 강하다. 이 중 시 ‘그 집 3’의 후반부는 이렇다. “그리고 아침이면 다시 단잠을 털고/남은 여장 추슬러 떠나야 한다/누구일까 그 모든 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며/허약한 내 손에 반짝이는 은전 한 닢 쥐어주고/지친 등 다독여 기어이 일으켜 세우는 손/정작 그 집의 숨은 주인은//생각하니 지난 한평생/나는 목숨을 담보로 그 집에 세든 세입자였다/아니 그는 내 목숨의 주인이었다”

시인은 이생에 잠시 머물렀으며, 지금 영원한 것에 다가가고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는 ‘그 집 2’에서는 “따뜻한 만찬의 식탁과 용서의 눈물로/문 열려 있을 것 같은 그 집이 꿈길에 자주 보였다”고 쓰고 있다.

양씨는 올봄부터 전화도 안 되는 경기 양평군 깊은 골짜기에 작업실을 두고 일한다.

“남동생이 가까이서 어머니를 모시고 있지만 온 남매가 어머니 앞에 모이는 것은 손으로 꼽을 정도예요. 어머니와 나누는 시간이 적어 늘 죄송하지요. 저랑 점심 같이 드시고 나면 ‘바쁠 텐데 어서 가 봐라’고 말씀하곤 하시는데 그때마다 저는….” 양씨는 말하다 말고 눈시울을 붉히곤 눈물을 훔쳤다.

양씨가 프랑스 유학을 갔던 시절 홍 시인은 갓난 아린씨를 4년 동안 키웠다. 홍 시인은 ‘지상에 잠시 세입자로 들었던 집을 여장을 추슬러 떠나야 한다’고 쓰고 있지만 양씨와 김씨 모녀에겐 홍씨가 지상의 든든한 집이었던 것 같다.

“할머니, 안녕.” “엄마 추석 때 또 올게요.”

“(깊은 골짜기에 있으니) 작업실에는 혼자 가지 마라.”

홍 시인은 짧은 만남 후에 딸과 손녀를 멀리 배웅했다.

권기태기자 kk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