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12월의 어느 날. 메모지 첫머리에 빨간 펜으로 ‘極秘(극비)’라고 적힌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친필 메모가 청와대 참모진에게 건네졌다.
‘유도탄 개발 지시…사거리는 200km 내외의 근거리.’
당시 한국의 군사기술은 3.5인치 로켓탄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수준. 제대로 서지도 못 하는 갓난아이에게 뛰라는 것이나 다름없는 지시였다.
박 대통령의 ‘자주국방’ 의지는 절박했고 그만큼 단호했다. 1968년 1·21사태, 1969년 4월 미 정보기 격추 사건….
북한은 점점 막나갔지만 믿었던 미국은 1969년 7월 “방위의 일차적 책임은 자국이 스스로 져야 한다”는 원칙을 발표했다. 이른바 ‘닉슨독트린’. 1971년 3월 주한미군 제7사단마저 한국 땅을 떠났다.
‘항공공업계획.’ 최초의 한국형 유도탄 개발 계획에 붙여진 엉뚱한 이름. 모든 일은 극도의 보안 아래 진행됐다. 과학자들은 국군보안사령부 안가에서 기초 작업에 착수했다. 부인들에게조차 “중요한 일로 장기 해외출장을 간다”고 했다.
박 대통령이 메모지를 건넨 지 6년4개월이 지난 1978년 4월 29일. 첫 비공개 시험에서 유도탄은 표적지가 아닌 바다로 떨어졌다. 참담한 실패. 이후 같은 해 9월 16일까지 연달아 실시된 7차례 실험까지 합쳐 성공률은 50%(4차례)에 불과했다.
과학자들의 뇌리에는 “국군의 날(10월 1일) 이전에 성공해야 한다”는 박 대통령의 간절함이 메아리쳤다.
마침내 첫 공개발사가 실시된 9월 26일. 박 대통령과 3부 요인, 주한미군 관계자, 국내 보도진이 지켜보는 가운데 발사된 ‘백곰’(K-1 미사일)은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탄착!”
유도탄의 표적지 명중을 알리는 한마디. 함성과 박수, 눈물이 어우러졌다.
이날 밤 박 대통령은 한국이 세계에서 7번째로 유도 미사일 개발국이 된 감격을 일기장에 적었다.
“금일 오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유도탄 시험발사가 있었다. (중략) 다 성공적이었다. 그동안 우리 과학자들과 기술진의 노고를 높이 치하한다.” 자주국방을 향한, 작지만 의미 있는 ‘거보(巨步)’를 내디딘 날이었다.
부형권기자 bookum9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