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인 28일 오후 전남 화순군 청풍면의 한 농가. 차례를 마친 4형제의 맏이인 정모씨(52·농업)는 “몇 년 만의 풍년이지만 쌀 시장이 개방되고 내년부터 수매제가 폐지된다고 하니 농사지을 마음이 안 난다”고 이야기를 꺼냈다. 굴착기 기사인 셋째(44)는 “어렵게 일감을 따내도 돈을 떼이는 경우가 많다”고, 자동차 부품공장 생산직 근로자인 막내(39)는 “상여금은 고사하고 2년째 추석 선물도 안나왔다”고 푸념했다.》
올해 추석은 어느 때보다 뒤숭숭하게 보냈다는 서민들이 많다. 경기가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데다 과거사 규명이나 국가보안법 개폐 문제 등 어지러운 시국 때문에 영 추석 분위기가 살지 않았다는 반응이다.
서울 노원구 상계동의 주부 신지원씨(40)는 “올해 봄과 가을에 대학을 졸업한 조카 네 명이 모두 취직을 못해 차례에 오지 않았다”며 “어른들은 ‘빨리 취직이 돼야 할 텐데 나라가 이 모양이라…’라고 걱정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경기 의정부의 친정을 찾은 주부 조미애씨(46·서울 영등포구)는 시금치 한 단이 5000원이나 해 사지 못했다고 분통을 터뜨리는 어머니를 달래야 했다.
27일 오후 경남 사천시의 한 횟집. 40대 중반인 이 지역 모 중학교 졸업생 12명은 동기모임을 하면서 국보법 개폐 등 시국문제에 대해 얘기를 나누다 서로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이런 민감한 사안을 화제로 삼다 설전이 벌어진 집도 많았다. 이 때문에 아예 일부 집안에서는 ‘정치 이야기’는 꺼내지 않기로 입단속을 하기도 했다.
KBS-미디어 다음의 ‘추석민심 토론게시판’에는 29일 ‘오늘 처갓집 분위기 정말 살벌했음’이라는 글이 올라왔다.
‘슈퍼보드손오공’이라는 아이디의 네티즌은 이 글에서 “둘째사위가 밥 먹다가 역사바로세우기 등 정부 정책을 칭찬하는 말을 했더니 택시운전을 하는 장인어른이 수저를 놓으시며 ‘집에 가라’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서울에서 대구로 간 김모씨(29·회사원)는 “경기 불황이나 시국 문제가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닌데도 집안 분위기가 성토대회 비슷해 마음이 답답했다”고 말했다.
20일 공식 출범한 친노(親盧) 성향의 인터넷 사이트 ‘노하우21’ 게시판 등에는 24일 추석 연휴 때 보수적인 지방의 친척과 설전이 벌어질 경우를 대비한 ‘예시문’이 뜨기도 했다.
한편 추석연휴 기간에 가족간 주된 화제를 묻는 미디어다음의 인터넷 투표에서는 29일 응답자 중 45.2%(1720명)가 ‘경기회복’이라고 답했다. 그 다음은 가정경제 문제(20.4%), 국가보안법 개폐 논란(13.8%), 수도 이전 논란(11.5%), 친일청산 등 과거사 규명(5.4%), 기타(3.8%)의 순이었다.
장강명기자 tesomio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