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의 날이다. 경사스럽고 기뻐야 할 이날에 착잡한 마음을 숨길 수 없다. 국가 원로들의 시국선언과 거리 시위에서의 ‘자유민주주의 수호’니, ‘국가보안법 철폐 결사반대’니 하는 절규가 우리의 귓전을 때린다. 50여년 전의 해방공간으로 돌아가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때는 소련 ‘붉은 군대’ 점령하의 북한지역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군 점령하의 남한에서도 좌익(공산주의자)이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다.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자유민주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르던 우리 눈앞에 ‘정치동물’ 좌익이 새빨간 글씨로 신문지에 써 붙인 벽보의 슬로건은 우리에게 큰 충격이었다. ‘같이 먹고 같이 살자’, ‘무상몰수 무상분배’ 등….
그때 우리의 시대정신은 ‘건국’이었다. 우리는 좌익의 극렬한 방해를 극복하며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했다. 이와 때를 같이해 국군도 탄생했다. 당시 각계각층에 침투한 공산당 프락치를 적발, 소탕하는 일은 힘겨운 싸움이었고 많은 희생이 따랐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6·25남침과 그 전후의 게릴라전 등은 신생 대한민국을 위기에 몰아넣었다.
창군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경험도 없고 준비도 부족했던 우리 국군이 처절한 싸움 끝에 그래도 ‘국군의 사명’을 완수해 이 나라를 지켜냈다. 이 일을 해낸 ‘위대한 세대’들은 그 애국심과 열정으로 조국 근대화와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 데 선도적 역할을 했다. 그리고 지난날 힘겹기는 했지만 보람 있었다고 자부하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다시 이 나라의 안보를,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를 역설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지난여름 우리는 연이어 충격을 받았다. ‘주적(主敵)개념의 실종’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상황에서,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중책을 맡고 있는 이종석씨가 현역 장성들 앞에서 강의하던 중 “전선의 장병들이 적개심을 가지고 대치하는 것보다 조국에 대한 애정으로 무장하는 쪽이 오히려 강한 군대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는 보도를 접했다.
또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북한 남파간첩 내지 빨치산 출신 비전향 장기수의 결과적 민주화운동 유공’ 운운하는 망발이 있었고, 공영 KBS TV에서 북한 공산당(조선노동당)의 ‘적기가’가 배경음악으로 울려 퍼진 것을 듣게 되더니 최근에는 보안법을 박물관에 보내야 한다는 이 나라 대통령의 말을 듣기에까지 이르렀다.
이제 아둔한 사람의 머리로도 4월 박정성 해군소장이 끝내 중장으로 진급하지 못하고 제대해야만 했던 사정을 짐작할 만하다. 그는 1999년 6월 15일 서해 북방한계선(NLL) 남쪽 우리 영해에서 북한 해군 경비정의 도발로 시작된 ‘연평해전’에서 통쾌한 승리를 거둔 서해함대의 사령관이었다. 그런 해군제독에 대한 보답이 겨우 ‘조용한 제대’라니….
지금 우리가 대한민국에 사는지 헷갈릴 지경이다. 5·16 직전 ‘혼돈의 시대’보다 더한 상황이란 말도 들린다. 군에 지워진 국가안보라는 ‘현실의 짐’이 제56회 국군의 날을 맞는 기쁨을 압도해 착잡하다.
민병돈 전 육군사관학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