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기에 선 과학기술계오세정 객원논설위원¤서울대 교수¤물리학
9월 1일 국회를 통과한 과학기술 부총리제의 후속 조치가 마무리돼 곧 정식 출범한다는 소식이다. 과학기술부 장관이 부총리로 격상돼 정부의 과학기술 관련 정책을 총괄하고, 국가 연구개발(R&D)사업의 조정 및 예산 배분 기능을 담당하게 되는 새 체제는 우리나라 과학기술 행정체제의 커다란 변혁을 의미한다. 특히 민간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과학기술 혁신본부’는 과거 기획예산처 공무원들이 결정했던 국가 R&D사업의 우선순위를 장기적이고 전문가적 안목으로 평가 조정할 수 있는 틀을 마련한 것이라서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다.
왜 신바람 나지 않을까
사실 참여정부는 ‘과학기술 중심사회 구축’을 12대 국정과제의 하나로 삼고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대통령비서실에 과학기술정보보좌관을 임명하고 이공계 전공자의 공직 진출 확대 방안을 마련했으며, 전문연구요원의 의무복무 기간을 3년으로 줄이는 등 그동안 과학기술자들이 요구했던 사항들을 정책에 많이 반영했다.
여기에 부총리를 통한 과학기술정책의 종합조정과 전문가들에 의한 정부 연구개발사업의 평가시스템까지 정착되면, 적어도 제도적으로는 한국 과학기술계가 염원하던 주요 사항들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쯤 되면 이 땅의 과학기술자들은 사기가 크게 진작돼 신바람이 날 만도 한데, 애석하게도 연구 현장에서는 그런 분위기가 별로 느껴지지 않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극심한 불황 속에 전반적으로 침체돼 있는 사회 분위기의 영향도 적지 않을 것이다. 또한 청소년들의 이공계 기피 현상이 개선되지 않는 현실에서 한국 과학기술계의 미래를 낙관할 수 없다는 근본적인 우려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요인으로, 정부의 과학기술 우대 정책들이 추진 과정에서 이곳저곳 삐걱거리며 과연 본래 의도대로 시행될는지 과학자들에게 확신을 주지 못했던 점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이공계의 공직 진출 확대 정책은 공무원들의 반발로 시행 방안이 축소 왜곡되기 일쑤였고, 부총리제 실시에 따른 부처별 업무 조정도 R&D 지원체제의 효율화라는 본래 의도는 간데없이 부처간 힘겨루기로 변질해 과학자들에게 환멸을 안겨 주었다. 심지어 전문가들에게 국가 R&D사업의 평가와 조정을 맡기겠다는 의도의 과학기술혁신본부도 결국은 공무원 자리를 늘리는 데 이용될 것이라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다. 비전문가인 공무원들이 좌지우지하는 조직이라면 그것이 예산처든 과학기술혁신본부든 일선 연구자들이 무슨 차이를 느낄 것인가.
그러나 정부의 일처리가 매끄럽지 못했다 하더라도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중요한 제도적 토대를 마련한 것은 사실이다. 이제 이러한 토대를 활용해 한국 과학기술 수준의 한 단계 도약을 이루어 내는 것은 정부가 아니라 과학기술자들의 몫이다. 사실 그동안 우리 과학기술자들은 정부와의 관계에서 능동적으로 이끌어가기보다는 수동적인 입장을 취해 왔던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각자 연구실에서 할 일이 바빴기 때문이기도 했고, 공무원의 그늘에서 과학자들이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정부만 바라보지 말라
그러나 이제는 적어도 제도상으로는 과학자들이 고위 공직에 진출할 수도 있고, 정부의 R&D 정책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길도 열려 있다. 이와 같은 전환기를 맞아서 과학자들은 새로운 여건에 맞는 능동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
특히 ‘감투’ 쓴 분들의 심기일전이 요구된다. 과거처럼 과학기술계의 지도급 인사들이 정부의 눈치나 봐서는 과학자들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새로운 제도가 성공적으로 정착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그 폐해는 고스란히 후배 과학자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과학자들이 요구하던 제도를 마련해 주고 나름대로 투자를 늘렸는데도 기대한 성과가 나오지 않으면, 당연히 과학기술자 집단 전체에 대한 매서운 질책이 쏟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무조건 정부만 바라보기보다 과학자들 자신이 주어진 여건을 발판으로 독자적인 도약을 도모해야 할 때다. sjoh@plaza.snu.ac.kr
오세정 객원논설위원·서울대 교수·물리학 sjoh@plaza.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