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이 ‘회계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국민은행과 하이닉스 회계부정 사건이 불거지자 재무제표 작성 틀인 회계처리기준(회계기준)을 보수적으로 바꾸는 기업이 부쩍 늘어난 것.
증권거래소와 코스닥증권시장은 올해 들어 57개사가 회계기준을 바꿨다고 4일 밝혔다.
금융감독원 회계제도실 이석준 팀장은 “기업들이 내년 집단소송제 도입을 앞두고 회계기준을 강화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회계장부 ‘바꿔 바꿔’=분식(粉飾)회계설이 시장에 돌면 자금줄이 끊긴다는 위기감이 기업들 사이에 팽배해 있다.
기업들이 가장 신경 쓰는 것은 국민은행 회계부정의 쟁점이었던 대손충당금. 대손충당금은 자산 부실 위험에 대비해 기업이 일부 이익금을 떼어내 적립하는 돈이다.
온라인 교육업체인 웅진닷컴 권대호 경영관리팀장은 “대손비율을 꾸준히 높여 충당금 규모를 늘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웅진닷컴은 또 회계기준을 바꿔 1년에 한 차례 하던 재고자산 평가를 매달 실시키로 했다. 손익규모를 월 단위로 파악하기 위해서다.
여성 정장을 만드는 데코는 반품에 대비해 충당금 26억원을 쌓았다. 외부감사기관인 안진회계법인이 회계기준 변경을 제의했고 데코측이 이를 받아들인 것.
회계 투명성이 강조되다 보니 금감원이 회계기준을 수정하라고 업체에 권유하는 일까지 생겼다.
금감원은 지난달 광고업체인 오리콤이 매체광고를 대행할 때 지급하는 수수료를 판매관리비가 아닌 매출원가에 포함시키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오리콤은 즉각 이 의견을 수용했다. 회계기준을 수정해 올해 7월 말 현재 누적 매출 총이익이 18억원 감소하는 부담을 감수하기로 한 것.
오리콤 김기수 부장은 “순이익에 영향을 주지 않는데 굳이 회계기준을 못 바꾸겠다고 버틸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왜 바꾸나=전문가들은 회계기준 변경 이유로 △업계 공통 회계기준 수용 △집단소송제 대비 △손실 줄이기 등을 꼽고 있다.
기업들은 동종 업계에서 통용되는 회계기준을 채택해야 의혹을 사지 않는다고 본다. 많은 기업이 채택하는 회계기준이 투명하다는 것.
내년 집단소송제 시행 전에 오류를 수정해야 한다는 점도 회계기준 변경을 부추기는 요인이다.
A기업 재무담당 이사는 “손익 관련 지표에 영향을 주는 회계기준을 바꾼 덕분에 과거 몇년간 잘못 기재됐던 숫자를 고칠 수 있었다”고 털어놨다.
회계기준을 바꿔 손실을 줄이는 기업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공인회계사는 “중국에 진출한 일부 기업들이 결손을 줄이려고 회계기준을 바꾸는 사례가 있는 것 같다”고 귀띔했다.
▽기준 변경 모르면 혼란=회계기준 변경이 투자자를 혼란스럽게 할 수도 있다.
우성사료는 최근 해외 현지법인에 투자한 주식 평가방식을 바꾼 결과 순이익이 줄었다. 회계기준 변경 사실을 간과한 일부 투자자는 우성사료의 손익계산서에서 2003년 상반기 순이익이 2억원 남짓 감소한 사실을 발견하고 당황하기도 했다.
반면 회계기준 변경에 대한 긍정론도 있다. 업종별 회계기준이 표준화할 경우 투자자들이 객관적으로 기업을 볼 수 있다는 것. 동종 업종 내 기업의 회계기준이 같으면 매출액과 순이익만 비교해 수익성을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립회계법인 권중목 회계사는 “외부 감사기관의 철저한 감리를 거치는 만큼 회계기준 변경 후 투명성이 높아지는 일이 많다”고 말했다.
홍수용기자 legman@donga.com
송진흡기자 jinhup@donga.com
김창원기자 chang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