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간도’ 시리즈에 이어 비장미 가득한 홍콩 누아르 ‘강호’에 출연하며 화려한 부활을 알린 류더화. 사진제공 젊은기획
‘열혈남아’ ‘천장지구’, 그리고 ‘아비정전’ 등을 통해 홍콩 현대영화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류더화(劉德華)는 언제부턴가 안 되는 영화들에만 계속 출연하며 제살을 깎아먹었다. 예컨대 ‘스트리트 파이팅’ 같은 작품 혹은 ‘흑마’나 ‘파이터 블루’ 같은 영화들이 그것이다. 40편에 이르는 류더화의 필모그래피 가운데 아랫줄에 놓여 있는 작품들은 대부분 목불인견 수준일 때가 많았다. 우리들 대부분은 그의 영화를 다시 찾지 않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 40대 중반. 서서히 끝나가는 스타로 여겨졌다.
그런 류더화가 다시 과거의 화려한 영광을 되찾고 있다. 시쳇말로 얘기해서 그는 요즘 다시 ‘뜨고’ 있다. 계기가 됐던 작품으로는 아무래도 화제작 ‘무간도’와 ‘무간도3’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이들 영화에서 그는 경찰 조직 내부에 잠입해 살아가는 마피아 조직의 스파이 역을 맡아 열연했다. 마치 마지막 연기인생을 걸 듯 류더화는 거기서 짧게 자른 머리와 다이어트로 바짝 감량한 몸매를 하고 나와 이제 더 이상 조직원도 아니고 더군다나 경찰도 아닌, 그래서 정체성을 상실하고 방황하는 인물을 빼어나게 소화해 냈다. 어떤 사람은 류더화의 연기 투혼이 ‘무간도’에서 가장 뛰어난 볼거리라고 얘기했을 정도다.
류더화의 극중 모습은 한편으로는 지금 홍콩 영화계가 안고 있는 고민, 곧 자신들이 할리우드 영화도 아니고 더군다나 중국영화도 아닌, 그럼으로써 세계 영화계에서 점점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전락하고 있다는 자기반성에 대한 거울처럼 느껴졌다. ‘무간도’란 영화가 비교적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이유, 류더화가 매력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던 이유는 그렇게 영화 속 주인공의 고민이 현실 속 사람들의 고민과 묘한 공감의 연대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류더화의 부활은 어쩌면 홍콩 누아르의 부활, 더 나아가 홍콩영화의 부활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홍콩 영화계는 ‘무간도’ 이후 산업적으로 다시 한번 활황세를 타고 있다. 1980년대 한 시대를 풍미했던 홍콩 누아르 계열의 작품들이 다시 한번 큰 인기를 모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연장선상에서 만들어진 영화가 바로 이번 작품 ‘강호’다.
어릴 때부터 죽마고우로 커 온 두 친구가 있고 이 둘은 각각 홍콩 최대 마피아인 삼합회의 큰형님 ‘홍’(류더화)과 부두목 ‘레프티’(장쉐유·張學友)로 성장했지만 소두목 3명의 처리 문제를 놓고 날카롭게 대립한다. 레프티는 급기야 큰형님인 홍을 자신의 식당에 연금해 놓은 채 소두목들을 처단하기 시작하고,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홍마저도 처치하려는 음모까지 꾸며 놓는다. 영화는 둘 사이의 날카로운 신경전, 소두목들을 향한 조직의 살육전, 또 홍을 처치하고 조직의 강자로 올라서려는 치기어린 젊은 갱스터 두 명 등 세 가지 이야기를 속도감 있게 교차 편집해 나간다.
스포일러(spoiler)라고 빈축 살 것을 무릅쓰고 영화의 진짜 줄거리에 대해 조금 더 힌트를 주자면, 이 세 가지의 이야기는 공간만을 뛰어넘는 것이 아니라 시간마저 뛰어넘는다. 세 가지 이야기 가운데 하나는 플래시백에 해당한다. 영화의 마지막에 나름대로 크나 큰 반전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눈치 빠른 관객들이라면 초반부터 이 영화의 맥거핀(MacGuffin·소설이나 영화에서 어떤 사실이나 행동을 매우 중요한 것처럼 꾸며내 독자와 관객들로 하여금 엉뚱한 결말을 상상케 하는 장치)을 찾아낼 것이다.
이 영화는 언뜻 과거에 한참 많이 봤던 홍콩식 갱스터 무비의 그렇고 그런 얘기나 분위기에서 한 치도 벗어나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홍콩 영화계가 이 영화를 통해 매우 흥미로운 선언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화 속 류더화와 장쉐유의 몰락, 그리고 그들을 처단하려는 젊은 킬러 두 명(그중 한 명은 ‘무간도2’에서 류더화의 젊은 시절을 연기한 위원러·余文樂이다)의 모습처럼 홍콩 영화계 스스로도 어쩌면 더 나은 영화 발전을 위해 ‘폭력적인’ 세대교체가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삶에서 혁명은 피를 요구하는 것일까. 비장미가 넘치는 홍콩 누아르를 다시 만나는 것은 너나 할 것 없이 반가운 일이겠으나 오랫동안 씁쓸한 여운이 남는 것은 그 때문이다. 22일 개봉.
오동진 영화평론가 ohdjin@hotam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