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기념일이나 국경일도 그렇지만 한글날이 되면 각 언론은 특집을 꾸며 우리말 오염 실태를 고발하고 대책을 마련하자는 토론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언론사들이 평소 우리말과 글을 오염시키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데 있다.
외래어나 외국어의 남용 실태만 봐도 그렇다. 코드나 님비, 로드맵, 웰빙이란 말을 누가 먼저 퍼뜨렸는가. 방송 프로그램의 제목을 보자. ‘모닝와이드’ ‘피플 세상 속으로’ ‘○○토크쇼’ ‘울라불라 블루 짱’ ‘라이브러리 인물탐구’ ‘시사투나잇’ ‘뉴스퍼레이드’ ‘나이트라인’…. 영어 일색이다. 그뿐 아니다. ‘꾸러기’와 같은 접사가 버젓이 방송 제목으로 쓰이고 얼짱, 왕따, 떴다방, 끼와 같은 품위 없는 말들이 신문의 표제어로 쓰이고 있다.
한편 청소년들은 인터넷 공간에서 자기들끼리만 통하는 통신언어를 만들어 씀으로 해서 한글 파괴 현상은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그들이 사이버 공간에서 쓰는 용어는 ‘어솨요(어서 오세요)’ ‘샘(선생님)’과 같은 줄여 쓰기는 기본이고 ‘마니(많이)’ ‘추카(축하)’처럼 소리 나는 대로 쓰기, ‘후다’ ‘얼굴 까’ 등의 상스러운 은어, 이른바 ‘외계어’라고까지 부르는, 특수문자를 사용한 자기들만의 언어 등 우리말을 어지럽히는 일은 무수히 많다.
우리 말글의 오용과 파괴 현상은 우리의 노력에 의해 고쳐질 수 있는 것들도 있지만 인터넷 통신언어 분야는 그 특성상 고치자고 강요하기보다는 일상생활 언어와 구별해 쓸 수 있도록 지도하고 계몽하는 일이 필요하다.
한글학회는 이미 인터넷이란 말을 ‘누리그물’로, 홈페이지는 ‘누리집’으로 바꿔 쓰고 있다. 또 국립국어연구원은 외래어를 우리말로 바꿔 나가기 위한 작업으로 누리꾼(네티즌)들에게 순화 대상 용어를 투표로 물어 우리말로 바꾸는 운동을 전개하기도 한다.
한글날을 계기로 우리말과 한글을 사랑하고 바로 쓰자고 떠들기보다 평소 우리가 늘 쓰는 말과 글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영어를 잘못 쓸까봐 영어사전은 책상머리에 늘 비치하면서도 국어사전은 준비해 놓지 않은 지식인들도 없지 않다.
이런 기회에 영어 공용을 주장하거나 우리 말글에 한자를 섞어 쓰자는 한자 사대주의자들도 우리 말글의 장래를 위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한자 교육과 한자 병용은 아주 다른 것이다. 우리말의 특성상 한자교육의 필요성은 누구나 인정한다. 그러나 문자생활을 한자와 병행하고 초등학교 교과서부터 한자를 섞어 쓰자는 주장은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중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상용한자 1800자만 잘 공부해도 취직시험이나 국어 공부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제 우리는 세종대왕의 뜻을 기리는 의미에서도 해묵은 한자교육 논쟁을 거두고 오염돼가는 우리 말글을 곱고 바르게 가꾸어 가는 일에 매진해야 한다. 하나 더 보태어 할 일이 있다면 국경일에서 기념일로 격하된 ‘한글날’을 다시 국경일로 격상시켜야 할 일이다. 우리 민족이 세계에 자랑할 만한, 검증된 자랑거리 1호라면 ‘한글’밖에 더 있는가.
구법회 인천 연수중 교장·한글학회 정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