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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문장으로 보는 유럽사’…역사를 수놓다

입력 | 2004-10-08 17:05:00


◇문장으로 보는 유럽사/하마모토 다카시 지음 박재현 옮김/227쪽 1만원 달과소

나폴레옹이 황제 대관식 6개월 전부터 시작한 일은 자신의 문장(紋章)을 제정하는 것이었다. 독수리와 사자를 놓고 고심하던 나폴레옹은 신성로마제국의 상징이었던 독수리를 자신의 문장에 넣었다.

1871년 독일제국이 세워진 후 빌헬름 1세도 대관식 때 ‘신성’ ‘황제’를 상징하는 독수리를 문장에 사용했고 이는 바이마르공화국에도 계승됐다. 나치 시절엔 나치 십자가(하켄크로이츠)를 쥔 독수리가 문장에 등장했다. 1945년 이후에 나타난 쇠사슬을 찬 독수리 문장은 나치로부터의 해방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봉건주의, 절대주의, 공화주의, 나치즘, 전후 민주주의를 거치면서 살아남은 독수리 모티브의 문장은 유럽의 역사와 문화에서 문장이 얼마나 깊게 뿌리내리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저자가 밝혔듯이 “문장이라는 작은 세계 안에는 유럽의 역사를 탄생시킨 문화가 복합적으로 응축되어 있다.”

이 책은 문장의 역사와 발달과정, 사자 백합 문장 등 주요 모티브들과 그 의미, 문장 읽는 방법 등 문장학(紋章學)의 기초를 알기 쉽게 소개했다.

문장은 12세기경 서유럽에서 시작됐다. 기사가 얼굴까지 뒤덮는 투구를 착용하면서 아군과 적군을 구별할 표시가 필요해짐에 따라 방패에 문양을 그려 넣은 데서 비롯된 것. 이후 문장은 왕족이나 성직자, 귀족의 권위와 신분을 나타내는 표시로 발전했다.

문장은 원칙적으로 장남에게만 계승된 탓에 한 가문 내에서도 변형된 문장이 수없이 생겨났고 혼인에 따라 가문들의 문장이 합쳐지기도 했다. 문장을 만들 때는 일정한 원칙이 있기 때문에 문장의 위치나 무늬, 도안을 잘 살펴보면 가문이나 인척관계도 알 수 있다.

영국 에드워드 3세는 사자 무늬와 함께 프랑스 왕가에서 사용해 온 백합 무늬를 문장에 사용했다. 외가가 프랑스 왕가 혈통이었던 그는 프랑스 왕가 문장인 백합 무늬를 자신의 문장에 넣음으로써 혹시라도 프랑스 왕가의 가문이 끊겼을 때 왕위를 계승할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식별’을 위해 생겨난 문장은 분화를 거듭하면서 근대 이후에는 일반인은 알아보기 힘들 만큼 복잡해졌다. 이를 전문적으로 읽어내는 ‘문장관’이라는 직업까지 생겨났다. 이들은 문장 상속시 도안, 색채, 무늬 등에 대한 규칙을 관리했고 문장 분쟁도 중재했다.

신분 사회에서 수직적 관계의 상징이었던 문장은 점차 수평관계의 아이덴티티를 나타내는 방향으로 옮겨갔다. 19세기 신흥 도시들이 생겨나면서 연대감 형성 및 공동체 아이덴티티 표시를 위해 도시 문장과 주(州) 문장이 쏟아져 나와 ‘도시 문장 르네상스’를 이뤘다. 20세기 초 들어 문장관이 완전히 사라졌다.

강수진기자 sjk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