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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조선, 비둘기-앵무새도 연구했네

입력 | 2004-10-10 18:14:00

조선 후기 과거시험장 풍경. 18세기 조선 지식인사회는 방대한 데이터베이스의 확충과 지식검색의 중요성이 부각됐다는 점에서 인터넷시대인 오늘날 한국사회와 유사한 특징을 보였다.-동아일보 자료사진


《최근 18세기 조선사회를 미시사적으로 접근한 책들이 많이 출간되고 있다. ‘조선의 뒷골목 풍경’, ‘미쳐야 미친다’,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책에 미친 바보’ 등이 바로 그런 책들이다. 과거의 18세기 연구가 실학사상에 초점을 맞췄다면 오늘날 18세기 연구는 당대를 살았던 지식인들의 구체적 삶과 지적 활동, 그리고 사회상을 주로 조명하고 있다. 이렇게 생생하게 다가서는 18세기 지식인사회의 풍경은 21세기 한국과 매우 유사하다.》

18세기 조선에서는 청나라를 통한 백과사전적 지식의 유입으로 성리학 중심의 지식 독점현상이 깨지는 ‘지식의 빅뱅’ 현상이 발생하면서 지식의 유통과 생산 방식이 큰 변화를 보였다.

청나라는 그 무렵 유학관련 서적을 집대성한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이 출간되고 이보다 더 방대한 ‘사고전서(四庫全書)’의 출간을 위해 엄청난 서적들이 베이징(北京) 유리창(琉璃廠) 거리로 집결됐다.

여기에 서양의 천주학과 과학문물을 소개하는 책자들도 국내에 유입됐다. 이는 곧 대량의 지식 데이터베이스가 구축됐음을 의미한다.

‘미쳐야 미친다’의 저자 정민 한양대 교수는 이런 지식의 집적과 유통의 변화가 학자들의 지적 활동에도 큰 변화를 일으켰다고 분석한다. 18세기 무렵부터 학자들에게 중요한 일은 ‘고문(古文)을 얼마나 정확하게 꿰고 있나보다 특정 주제에 관련되는 지식을 얼마나 많이 동원하고 결합시킬 수 있느냐’로 전환됐다는 것이다.

이는 한 가지 주제를 놓고 집중적으로 탐구한 저서가 새롭게 발견되면서 뒷받침된다. 유득공이 완상용 비둘기 사육에 대해 쓴 ‘발합경(S합經)’이나 이서구가 앵무새에 대해 쓴 ‘녹앵무경(綠鸚鵡經)’ 등은 당시 유학자들로선 하찮아 보이는 주제에 대해 고금의 문헌기록들을 총동원한다. 또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 이덕무 등 당대의 일류지식인들이 오늘날의 지식검색사라 할 규장각 검서관들이었다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러한 점은 디지털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수많은 지식이 축적되고 인터넷 지식검색을 통해 이에 대한 접근이 자유로워진 오늘날 한국 지식인사회의 풍경과 유사하다. 최근 한국사회에선 거대담론보다 사소한 주제 하나를 파고드는 저술활동이 각광받고 있다. 과거에는 지식의 독점이 권력이 됐지만, 지금은 해방된 지식을 어떻게 결부시키고 활용해 그 부가가치를 높이느냐가 더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18세기의 지적 르네상스가 조선사회의 발전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19세기에 체제 전반의 붕괴로 이어진 과정을 오늘날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의 저자 이덕일씨는 “다산 정약용과 연암 박지원 등 새로운 지식인층이 주류로 편입되지 못하면서 조선의 지식인사회가 성리학 중심주의라는 지적 폐쇄회로에 갇혔다”며 “오늘날 한국의 지식인사회도 상아탑의 폐쇄적 권위와 전공분야 지식에 대한 독점적 자세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조선의 뒷골목 풍경’의 저자 강명관 부산대 교수는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지식 대중화에 기여한 것에 비해 조선은 가장 먼저 금속활자를 개발했다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지식 확산을 등한시했다”면서 오늘날도 대중과 유리된 학문연구 행태가 여전하다고 비판했다.

서울대 국사학과 이태진 교수는 “백과전서파가 등장하는 등 비슷한 지적풍토가 형성됐던 18세기 유럽과 조선을 비교할 때 유럽은 수많은 아카데미와 살롱이 형성되면서 이런 지적 풍토를 지원했고 국가간 지적교류를 확대시켰다. 하지만 조선은 규장각을 설치했던 정조가 죽은 뒤 이에 실패했다”며 국가의 체계적 지원과 국제교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