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레슬링이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실망감이란…. 어린 시절 우상이었던 박치기 왕 김일 선수는 그렇게 잊혀져 갔다.
그러나 웬걸. 다른 볼거리도 많은 미국에선 프로 레슬링이 여전히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지 않은가.
비결은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드라마로 변신에 성공한 때문.
무대 위 현란한 기술도 중요하지만 레슬러간의 장외 설전과 몇 달에 걸쳐 일관된 줄거리를 갖춘 선과 악의 대결구도는 뻔해 보이면서도 새로운 흥미를 유발시키기에 충분하다.
‘가을의 고전’으로 불리는 프로야구 포스트시즌만 되면 새색시마냥 가슴이 설레는 것은 비슷한 이유에서다. 올해는 과연 어떤 드라마가 탄생할까. 게다가 이는 작가에게 비싼 원고료를 지불하는 프로레슬링과는 달리 ‘각본 없는 드라마’다.
그렇다면 이 드라마의 집필자는 과연 누구일까. 주연을 비롯한 각종 배역은 선수와 코칭스태프의 몫일 터. 작가는 다름 아닌 팬 여러분이다. 언론은 이를 도와주는 역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미국에선 100년 앙숙 보스턴과 양키스가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시리즈 격돌이 성사된 상태. 빨간 양말과 줄무늬 유니폼을 차례로 입었던 베이브 루스의 묘소는 벌써부터 팬들의 발길로 성황을 이루고 있다. ‘밤비노의 저주’가 풀리기를 기원하는 행렬과 이를 지속시키려는 행렬이다.
보스턴이 86년만의 정상복귀를 위해 모셔온 ‘우승 청부사’ 커트 실링의 “더 이상 저주는 없다”는 호언장담, 우승반지를 끼기 위해 스스로 양키스 문을 두드린 알렉스 로드리게스의 디비전시리즈 맹활약도 드라마를 더욱 극적으로 만들 소재다.
국내는 플레이오프에서 맞붙는 삼성과 두산이 대조적인 팀 컬러로 눈길을 끈다. ‘돈성’으로 불리는 부잣집 삼성과 투자엔 인색했지만 무명 돌풍을 일으킨 ‘뚱산’ 두산. 두산의 감독 영입제의를 뿌리친 삼성 선동렬 수석코치와 선동렬 대신 지휘봉을 잡고 대타 성공시대를 연 두산 김경문 감독의 외나무다리 승부도 관전 포인트다.
조금만 시야를 넓혀보라. 지구촌 스포츠 중에서 한 해 가장 많은 경기를 치르는 프로야구. 감동과 재미는 그 속에 널려 있다.
zangpab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