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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마당/정호열]설익은 개혁, 일자리 뺏는다

입력 | 2004-10-11 18:21:00


시인 김수영은 1960년대 이 나라를 일러 ‘사람이란 사람은 모두 고민하는 이 좁은 대지’라고 읊었다. 2004년 10월 현재 이 땅은 여전히 번민으로 넘친다. 1970년대와 80년대의 성장시대를 거친 탓에 이 고통은 더욱 새삼스럽다.

개혁은 여전히 잘 팔리는 브랜드다. 그러나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개혁이 가져오는 편익보다 비용이 훨씬 크면 그 개혁은 해서는 안 된다. 특히 스스로를 방어할 능력과 조직을 갖추지 못한 이들의 일자리를 없애는 결과를 가져올 정책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작년 9월 은행이나 증권회사도 보험상품을 팔 수 있게 하는 은행연계보험(방카쉬랑스)이 도입됐다. 은행연계보험은 할거주의의 폐해를 완화하고, 원스톱 쇼핑을 가능케 하며, 장기적으로 판매경쟁 촉진을 통한 보험료 인하가 기대되는 개혁정책이다.

그러나 시행 1년을 돌이켜볼 때, 보험료 인하 등의 ‘효과’는 뚜렷하지 않다. 원래 보험설계사나 대리점의 몫이던 판매수수료를 은행이 가져갈 따름이다. 나쁘게 말한다면, 벼룩의 간을 빼먹는 셈이다. 사이버판매 등으로 이미 그 입지가 불안해진 보험대리점이나 보험설계사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줬다. 40만명에 이르는, 주로 기층서민의 일자리가 ‘어, 어’ 하는 사이에 구조적으로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현행법상 자영업자인 이들은 노조라는 보호막도 없고,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할 변변한 협회 하나 갖추지 못했다. 더욱 답답한 일은 금융 당국이 은행연계보험을 통해 이들의 입지를 줄이고 있는 반면 노동부는 고용 창출 차원에서 대리점이나 중개사 양성에 예산을 투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부가 한편으로는 제도의 기반을 위축시키고, 다른 쪽에서는 더 많은 사람들을 내보내 이들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이기주의를 벗어나라는 것이 말은 쉽지만 현실적이지 않다. 국정 전반의 조정과 균형은 별도의 통합조정 기능에 맡기는 것이 효과적이다. 각종 개혁조치의 입안과 시행을 일자리와 관련해 종합적으로 저울질하는 기구를 새로 만들거나 기존 기관의 관련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 이 기능이 활성화되면 일자리를 새로 만들지는 못하더라도 숙려(熟廬) 없는 새 정책으로 인한 일자리의 대량 감소를 막거나 완급을 조절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학문을 나서는 젊은이들의 40%가 백수로 전락하는 오늘의 상황에 대해 정부 여당은 1차적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무작정 보호하는 것은 결코 능사가 아니다. 캐디를 근로자로 보호하자는 논의에 겁먹은 골프장들이 레일을 깔고 전동차를 도입해 캐디 수를 반 이하로 줄이고 있다고 한다. 보호정책이 시장 반응을 통해 정반대의 결과를 야기하는 것이다.

시장의 현실에 대한 이해를 기초로 개혁의 타이밍과 한계를 설정하는 지혜가 요청된다. 이도 저도 어려운 경우에는 결정을 피하고, 상황을 연장하는 노회함도 필요하다. 기회주의적이라는 이유로 여기저기서 뭇매를 맞지만, 직업 관료들의 식견과 경험이 그래도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들뜬 목소리로 설익은 이념을 파는 의인(義人)보다 회색빛 세리(稅吏)가 때로는 더 유용하다.

정호열 성균관대 교수·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