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등급제 논란이 정치적 이념적 논쟁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몇몇 대학이 등급제를 적용했다는 교육인적자원부의 발표가 나오자 해당 대학에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이를 보면서 마음 깊숙한 곳에서 의문이 생긴다. 그 대학들이 등급제를 적용했는지 사실 여부를 떠나, 대학이 자기가 가르칠 학생을 자기 판단에 의해 뽑지 못하는 나라가 한국 외에 과연 이 지구상에 어디 있는지 묻고 싶은 것이다.
▼평준화가 빚은 고교등급제 논란▼
고교등급제 논란은 기본적으로 학생의 학교 선택권을 인정하지 않는 고교평준화 정책의 문제점을 드러낸 것이다. 교육부의 새 대입제도 안은 고교평준화의 기본 틀을 고수하면서 사교육을 줄이고 공교육을 살려보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의 비중을 줄이고 내신의 비중을 높이는 것이 그 요체다.
문제는 수능도 당초에는 마찬가지 의지를 갖고 출발했다는 점이다. 탈교과로 종합적인 출제를 하게 되면 암기 위주의 교육이 없어지고 영어 수학 중심의 학원이 도태될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정책당국자의 판단은 빗나갔다. 학원은 재빨리 수능 체제에 적응했으나 학교는 그렇지 못했다. 이제 다시 수능의 비중을 줄이고 내신의 비중을 높여 공교육을 살려보겠다는 구상을 내놓은 것이다. 그러나 이번의 정책당국자의 판단은 수능 도입 당시보다 더 위험하게 보인다.
첫째, 내신성적이 대학 입학을 좌우하게 되면 인성교육의 토대가 뿌리째 흔들릴 수 있다. 내신성적은 출결 특활 경시제도 봉사활동 등 다양한 평가를 전제한다고 하지만 결국 학교 교과 성적이 주가 될 수밖에 없다. 학교간의 경쟁은 없고 학교 안에서의 경쟁만 있다. 내가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는 내 친구를 이겨야 한다. 여기엔 윈윈 전략이란 있을 수 없다. 이런 학습 분위기에선 우정도 협동도 봉사도 공동체도 있을 수 없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발표에 의하면, 우리나라 학생의 협동학습 능력이 회원국 중 최하위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 교육의 최대 취약점이 극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둘째, 학원에 비해 학교교육의 경쟁력은 더 떨어지게 될 것이다. 학교간의 경쟁이 금지된 상황에서 학생간의 무한경쟁만 요구하는 것이니, 교사의 입장에서 보면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치나 대충대충 가르치나 마찬가지다. 타 학교와 비교가 안 되니, 학생 전체의 실력이 낮아져도 교사는 신경 쓸 일이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어떤 교사가 열정을 불태우겠는가.
셋째, 사교육이 줄어든다는 보장이 없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오히려 더 기승을 부릴 것이다. 수능 이전을 영어 수학 중심의 소품종 대량과외시대, 수능 이후를 다품종 소량과외시대라 한다면, 이제는 내신에다가 수능 논술 심층면접이 강화되니 다품종 대량과외시대가 오지 않겠는가. 사교육의 의존도가 줄 것이라는 생각은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다. 교육부 안이 현실화되면 수능의 변별력과 내신의 신뢰성에 의문을 갖는 대학은 논술과 심층면접에 의존하게 될 것이며 이는 사실상의 본고사가 될 것이다. 막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교육본질 입각한 제도개혁 필요▼
30년 전의 논리가 언제까지 타당성을 갖겠는가. 지금은 21세기 국제경쟁의 시대다. 고교등급제 문제는 고교평준화 정책의 재검토에서 해결 방안을 찾아야 한다. 공교육 붕괴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교평준화 정책이 있다.
평준화는 가난한 사람, 소외받는 계층을 위한 제도라고 정부는 말하지만 실제 최대 피해자는 서민이다. 사교육을 오히려 부추기는 평준화는 아버지의 재력과 어머니의 정보력에 의해 자식의 운명을 결정하는 제도다.
평준화의 덫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 교육정책은 탈이념화 탈정치화해야 한다. 정치적 이념적 배려가 아닌 교육 본질에 입각한 제도 개혁이 이뤄져야 한다.
김진성 바른교육시민운동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