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굴지 컴퓨터 제작회사의 재활용품 처리 담당 직원인 한모씨(32)는 최근 소규모 컴퓨터 가게를 돌아다니며 중고 컴퓨터를 수만대나 구입했다.
‘생산자 책임 재활용(EPR)제도’에 따라 회사에 할당된 의무수거량을 채울 만큼의 폐컴퓨터를 구할 수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중고컴퓨터를 구매한 것.
한씨는 “폐컴퓨터를 구하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며 “다른 회사들도 의무량을 못 채우는 경우가 많으며 대부분 의무 수거량의 30∼40%는 돈을 주고 사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지난해부터 실시되고 있는 EPR제도가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맞지 않는 내용이 많고 대 국민 홍보가 부족해 제대로 정착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TV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 컴퓨터 등 15개 품목을 대상으로 처음 실시됐다. 올해에는 형광등과 필름포장재(광택이 나는 합성수지 포장재, 라면봉지가 대표적임) 등 2개 품목이 추가됐다.
내년부터는 매년 1200만대의 중고품이 쏟아지는 휴대전화와 오디오도 적용 대상이 된다. 2006년부터는 프린터 폐카트리지도 대상에 추가될 가능성이 높다. 거의 대부분의 제조업체에 재활용품 수거가 발등의 불이 된 것.
문제는 이 제도가 강제하는 의무수거량 등 일부 내용이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올해부터 EPR제도의 대상이 된 필름포장재는 상당수 아파트단지나 주택가에서는 아예 분리수거조차 하지 않고 있다. 필름포장재가 EPR제도의 대상이라는 것을 아는 시민이 별로 없어 라면봉지 과자봉지 등 하루에도 수많은 필름포장재가 일반쓰레기에 섞여 버려지고 있다.
이 때문에 라면제조사 등 필름포장재 사용 업체들은 의무수거량(생산량의 약 30%)을 확보하기 위해 아예 한국플라스틱리사이클협회 등에 돈을 줘서 수거를 대행시키고 있다.
내년부터 EPR제도의 대상이 되는 휴대전화기는 수거 의무를 놓고 단말기 제조업체와 이동통신 업계가 대립하고 있어 아직 수거 계획을 만들지 못한 상태다.
한국전자산업환경협회 송효택 정책조사팀장은 “업체가 수거할 수 있는 폐기물 양은 품목 특징과 경기에 따라 크게 변한다”며 “환경부가 정하는 의무량도 이런 특징에 맞게 탄력적으로 조절해야 하고 또 시민들을 대상으로 적극적으로 홍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EPR제도란:
제품 생산업체가 버려진 제품의 일정량을 직접 수거해 의무적을 재활용하도록 하는 제도.
이완배기자 roryrer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