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치열했던 대통령선거는?
판단 기준을 1, 2위 득표차로 한다면 1963년 10월 15일 치러진 제5대 대선이 정답이다.
470만2640표를 얻어 당선한 민주공화당 박정희(朴正熙) 후보와 2위 민정당 윤보선(尹潽善) 후보(454만6614표)와의 표 차는 15만6026표에 불과했다.
16대 대선 때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후보는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후보를 55만980표 차로 눌렀다. 15대 대선에서는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金大中) 후보가 39만557표 차로 당선됐다. 두 선거 모두 피 말리는 박빙 승부였지만 5대 대선 때의 ‘기록’을 깨지는 못했다.
5대 대선 초반부는 박 후보의 독주였다. 공화당은 군대식의 막강한 조직력과 풍부한 자금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반면 야권은 후보도 단일화하지 못한 채 분열돼 있었다.
선거 구도를 뒤흔든 것은 박 후보에 대한 사상 공세. 민정당과 윤 후보는 투표를 20여일 앞두고 ‘박 후보는 여수순천 10·19사건과 관련 있는 공산주의자였을지 모른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른바 ‘사상 논쟁’, 요즘 말로 하면 ‘색깔론’에 불을 붙였다.
이에 박 후보도 10월 9일 부산 유세에서 “내가 빨갱이라면 전방 사단장, 야전군 참모장을 할 수 있었겠는가. 내가 사단을 몰고 이북에 넘어가면 어떻게 할 뻔했는가”라며 정면승부를 걸었다.
투표일인 15일부터 17일까지 3일간 진행된 개표도 엎치락뒤치락했다. 개표 상황을 전한 동아일보 16일자 1면 머리기사의 제목은 ‘박, 윤 두 후보, 초유의 시소게임’.
표심은 추풍령을 경계로 남북이 극명히 갈렸다. 서울 경기 강원 충청은 윤 후보, 영남 호남 제주는 박 후보를 선택했다. “남북한을 가르는 38도선에 이어, 남한을 가르는 36도선이 생겼다”는 농담이 돌았다. 기이한 표심 향배는 사상논쟁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고 정치학자들은 분석했다.
역사는 반복됐다. 그것도 나쁜 방향으로. 8년 뒤인 1971년 박정희 대통령과 김대중 신민당 후보가 격돌한 7대 대통령 선거. 개표 결과 영호남을 동서로 가르는 표심이 처음 표출됐다. 이후 한국사를 질곡으로 몰아넣은 지역감정의 시작이었다.
부형권기자 bookum9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