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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속의 서울]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와 정동길

입력 | 2004-10-14 18:46:00

장강명기자


개봉관에서 간판을 내린 뒤에도 ‘지독한 사랑’을 받는 한국 영화들이 몇 편 있다. 대표적인 게 ‘파이란’ ‘박하사탕’ ‘번지점프를 하다’ 등이다.

이들 영화는 온라인상에 ‘파사모’ ‘박사모’ ‘번사모’ 등의 동호회가 결성돼 회원들이 정기 모임을 갖고 재상영회를 가질 정도로 지속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열렬한 사랑을 받는 영화를 꼽는다면 2000년에 개봉된 ‘번지점프를 하다’가 아닐까. 인터넷 번사모는 회원이 5500명이 넘으며 올해까지 모두 8차례 재상영회를 가졌다.

영화가 가만가만히 이야기하는 ‘운명적인 사랑’에 공감한 사람이 그만큼 많았다는 뜻일 게다.

“버스정류장까지만 씌워 주시겠어요?” 갑자기 뛰어든 태희(이은주)와 인우(이병헌)는 정동길을 걸으며 운명 같은 사랑에 빠져든다. 예나 지금이나 이 길은 젊은 연인들이 다정히 걸어가는 운치 가득한 ‘연가’(戀街)다. -장강명기자

“사실 난 첫눈에 반하고 영원을 생각하고 뭐 장담하고, 그런 거 다 웃기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었거든.”

“나도 그랬어. 너 처음 봤을 때 우리 사랑하게 되겠구나…(생각했어).”

영화는 길에서 마주쳐 사랑에 빠지고 한 생(生)을 지나서도 이어가는 그런 사랑을 담담하면서도 진지한 톤으로 그려 간다.

소나기 오는 날, 인우(이병헌)의 우산에 갑자기 태희(이은주)가 뛰어든다. “죄송하지만 저기 버스정류장까지만 씌워 주시겠어요?” 인우는 태희에게 우산 속 공간을 내주느라 왼쪽 어깨가 푹 젖어 버리고 만다.

너무 긴장해 이름도, 다니는 학교도 물어보지 못한 인우는 그 후 맑은 날에도 우산을 들고 태희와 헤어졌던 버스정류장 앞을 어슬렁거린다. 김대승 감독은 이 같은 첫 만남이 이뤄지는 장소로 ‘정동길’을 택했다.

정동길이라는 명칭은 공식 이름은 아니다. 서울 중구 정동 덕수궁 대한문∼정동사거리까지 이어지는 이 길의 지명은 ‘덕수궁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가수 이문세씨가 ‘광화문 연가’에서 노래했듯, 덕수궁 돌담길에서 정동사거리로 이어지는 길을 그냥 정동길이라고 부른다.

이 길은 양쪽에 울창한 가로수가 늘어서 있고 정동제일교회, 신아기념관, 이화여고 심슨기념관 등 근대 건축물이 고풍스러운 멋을 더해 준다. 서울시립미술관과 정동극장, 난타 전용극장 등 문화예술 공간도 많다.

이 길은 차도와 보도 사이의 높이가 거의 같아 널찍해 보인다. 젊은 연인들은 이곳이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 덕수궁에 기거하던 고종의 아픔이 서린 장소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길의 운치에 빠져 디지털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기 바쁘다.

태희와 인우가 우산 속에서 처음 만나는 장소는 신아기념관 근처고, 우산을 같이 쓰고 걸어가는 길의 돌담은 이화여고의 담이다.

지하철 1, 2호선 시청역 1, 2번 출구에서 대한문 옆 돌담길을 따라 들어가거나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5번 출구로 나와 경향신문사 앞에서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된다.

의경들이 곳곳에 서 있다는 점만 빼면 서울시립미술관 앞 로터리에서 ‘하비브 하우스’(주한 미국대사관저)로 이어지는 덕수궁2길도 정동길 못지않게 예쁜 길이다.

장강명기자 tesomio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