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박순철
이윽고 시체와 뒤섞인 구덩이 안의 사람들이 야릇한 마비와 무력감에 빠져 두 눈만 껌벅이고 있을 때 말발굽소리와 함께 한 무리의 장수들이 나타났다. 오추마(烏U馬)에 높이 오른 패왕 항우와 그의 장수들이었다.
언덕 위에 이른 패왕은 말 위에서 잠시 발아래 구덩이를 내려보았다. 거기서 벌어지고 있는 참상에 잠시 눈살을 찌푸리는 듯했으나, 이내 차가운 낯빛으로 고개를 돌려 좌우를 바라보며 짧게 명했다.
“묻어라!”
그리고 다시 모두 들을 수 있을 만큼 큰소리로 외쳤다.
“모두 산 채 묻어 과인이 받은 천명(天命)에 맞선 죄가 얼마나 큰 것인지 천하가 알게 하라. 우리 서초(西楚)를 두려워하지 않은 죄와 과인이 믿고 아끼는 장졸들을 죽고 다치게 한 죄가 어떤 벌을 받게 되는지 만민에게 보여줘라.”
그런데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은 패왕 항우의 짧은 생애에서 되풀이되는 ‘산 채 묻기[갱]’란 포로 처리방식이다. 패왕은 구체적으로 기록된 것만도 세 번에, 암시되기로는 거의 통상적으로 항복한 적들을 산 채로 묻고 있다.
그때 패왕이 빠져 있던 격정이 눈먼 복수의 쾌감인지 아니면 믿고 아끼던 이들을 잃은 슬픔으로 뒤틀리고 모질어진 감상인지는 알 길이 없다. 그들을 산 채 묻기로 한 결정도 마찬가지다. 뒷사람들이 흔히 추측하듯, 포로 관리의 효율성만 따지는 냉정한 계산이었는지 아니면 타고난 잔인성과 흉포함의 발로였는지도 이제 와서 정확하게 알 길은 없다.
하지만 그런 생매장이 거지반 패왕의 손아귀에 들어온 천하를 다시 잃게 만든 원인 중에 하나라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기록을 보면 패왕은 정당성과 효율성을 굳게 믿으며 그 일을 되풀이한 듯하다. 나중에 외황(外黃)의 열세 살 난 아이에게서 깨우침을 받고서야 비로소 항복하거나 사로잡힌 적을 산 채 묻는 일을 그만둔다.
따라서 그때의 패왕에게는 그 생매장이 당연하기만 했을 것이다. 산 채로 땅에 묻혀 꺼져가는 수많은 생명의 절규보다는, 자신을 거기까지 끌어내 세월과 기력을 허비하게 만든 제왕(齊王) 전영에게 느끼는 분노가 더 강하게 패왕의 정서를 사로잡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못된 놈. 그래도 편하게 죽은 걸 다행으로 여겨라. 내게 사로잡혔으면 가죽을 벗기고 살점을 저며 죽였을 것이다!”
두 언덕 사이가 메워져 평평해질 무렵에야 그곳을 떠나며 패왕은 머리만 상자에 담겨온 전영을 떠올리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돌이켜 보면 숙부 항량(項梁)이 처음 동아(東阿)에서 전영을 구해줄 때부터가 악연의 시작이었다. 항량은 있는 힘을 다해 장함을 쳐부수고 전영을 구해냈으나, 전영은 곧장 제(齊)나라로 돌아가 집안싸움에만 골몰하였다. 그리고 항량이 글을 보내 함께 싸워주기를 청해도, 초나라로 도망쳐 온 전가(田假) 패거리의 목을 요구하며 끝내 그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전영만이라도 빨리 돌아와 항량 곁에 있었더라면 정도(定陶)의 참극은 없었을 것이라고 패왕은 굳게 믿고 있었다.
글 이문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