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상영된 ‘주홍글씨’의 한석규. 한때 배우로서 모든 것을 차지했던 그는 이제 처음 출발할 때의 마음으로 돌아갔다고 말했다. -사진제공 LJ필름
“어떤 한 산은 이미 올라 봤고, 그래서 이제 다른 산을 오르고 있습니다. 새로운 산이라 설레고, 때로는 산을 오른다는 느낌만으로도 즐겁습니다.”
15일 제9회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상영된 ‘주홍글씨’의 주연 한석규(40).
2003년 ‘이중간첩’ 이후 1년 만에 이 영화를 통해 팬들과 만나는 그는 “당신을 모르는 젊은 관객도 있다”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1995년 ‘닥터 봉’으로 영화계에 데뷔한 그는 ‘초록물고기’ ‘넘버3’ ‘접속’(이상 1997년)에 이어 ‘8월의 크리스마스’(1998년) ‘쉬리’(1999년)까지 한국영화의 중심이었다. 3년의 공백 끝에 출연했던 ‘이중간첩’의 흥행 실패가 그를 잊힌 배우로 만들었다.
하지만 “별일 없으셨죠”라는 특유의 느릿하면서도 듣기 좋은 목소리는 그가 이미 다른 길을 가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직접화법은 피했지만 그의 또 다른 산은 인기와 돈으로 상징되는 ‘스타의 산’이 아니라, ‘한석규 아니면 안 되는 어떤 것’이었다.
그는 ‘주홍글씨’에서 의문의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강력계 형사 기훈으로 출연해 지적이고 공격적인 형사, 열정적인 애인, 다정다감한 남편의 세 얼굴을 보여준다. 순종적인 아내 수현(엄지원), 정열적인 정부(情婦) 가희(이은주), 남편 살해혐의를 받고 있는 관능적인 경희(성현아) 등 색깔이 다른 세 여배우가 상대역으로 등장한다.
올해 초 영화를 준비하며 변혁 감독과 제작사 LJ필름 이승재 대표는 “이 복합적 캐릭터를 소화할 배우는 한석규밖에 없다. 캐스팅에 실패하면 영화를 찍지 못할 수도 있다”고 합의했다.
그는 ‘주홍글씨’가 한마디로 탐욕이라는 창에 인간 본성을 비춰본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시나리오를 처음 받아보니 맨 앞부분에 성경 창세기의 선악과(善惡果)에 대한 구절이 있었습니다. ‘왜 감독님이 이 구절을 썼을까’ 곰곰이 생각했죠. 이 작품은 인간의 본성 문제를 남녀간의 사랑으로 풀어간 영화입니다.”
배우로서 배우를 보는 그의 날카로움과 섬세함은 여전했다.
“상대역 세 여배우를 캔버스에 비유한다면 이은주씨는 이제 어떤 그림이라도 마음대로 그릴 수 있는 상태이고, 성현아씨는 준비돼 있지만 어떻게 그리냐를 본인이 더 고민해야 하며, 엄지원씨는 깨끗하게 비어 있는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색깔로 치면 은주씨는 파스텔톤, 현아씨는 도발적인 붉은색, 지원씨는 하얀색이죠.”
새로운 산을 오르기 위해 그는 노출을 꺼려온 그간의 고집도 버린 듯했다. 세 여배우와의 베드신은 그의 출연작 중 가장 수위가 높다.
그는 “내가 거부했던 것은 관객들에게 아무런 의미 없는 눈요깃거리로서의 노출신, 즉 ‘죽어 버린’ 신”이라며 “이 작품의 베드신은 캐릭터를 표현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10년간 영화 10편. 그 사이 그도 여섯 살, 네 살, 두 살인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됐다. 아이가 넷이 될 기회가 있다면 마다하지 않겠다고 했다.
“집사람이나 저나 모두 막둥이라서 아이 욕심이 좀 많죠. 모두 한 방에서 잠을 자요. 아내도 성우였고 저도 성우 출신이라 아이들 자기 전에 동화책을 읽어주는데 정말 행복한 순간입니다. 그림 떠오르시죠? 소리도 좋고 정말 ‘괜찮은’ 그림입니다.”
항간에 나돈 ‘감독 한석규’ 설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답했다.
“감독은 세상을 향해 얘기를 하거나 던지는 사람이고, 배우는 그런 감독의 이야기를 몸으로 실어 나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에는 하고 싶은 얘기가 없었는데 이제는 문득 문득 어떤 얘기를 하고 싶어요. 그게 꼭 감독으로 데뷔하겠다는 뜻은 아니죠.”
그가 영화계의 중심에서 벗어나자 사람들은 한때 흥행의 보증수표로 소문났던 이른바 ‘한석규의 선구안(選球眼)’이 나빠졌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최근 몇 년간 침묵하며 응시하고 있었던 것은 작품뿐 아니라 배우로서의 삶, 영화, 가족 등 더 큰 세계가 아니었을까. 그의 눈은 여전히 밝고 건강하고 진지하다.
김갑식기자 dunanwor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