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옥기자
2001년 3월 4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2층 주택에서 불이 났다. 화재 진압을 위해 현장에 출동한 서울 서부소방서 소방관 6명은 ‘1층에 사람이 남아 있다’는 주민의 말을 듣고 불타오르는 건물로 뛰어 들어갔다가 갑자기 무너진 건물더미에 깔려 모두 참변을 당했다.
소방관들의 참사 소식은 언론에 크게 보도됐고 경기 이천소방서 산하 양평군 청운파견소에서 근무하는 박병철 소방교(48·사진)는 안타까운 마음에 TV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때 박 소방교의 눈에 비친 한 유가족이 있었다. 갓 걸음마를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 아이를 꼭 끌어안고 오열하고 있는 고 박상욱 소방장의 부인. 한참이 지나도록 이 유가족의 모습을 잊을 수 없었던 박 소방교는 같은 해 7월경 아이를 위해 매달 4만7000원씩 들어가는 5년 만기 적금통장을 만들었다.
적금통장은 한 달 뒤 이름도 모르는 박 소방장의 부인에게 전달됐고 박 소방교는 이들을 위해 3년이 넘도록 빠짐없이 적금을 붓고 있다.
박 소방교가 돕는 순직 소방관의 유가족은 이들이 처음이 아니다. 1996년 11월 9일 ‘소방의 날’ 행사에 참석한 그는 화재 현장에서 순직한 경기 고양소방서 박모 소방관의 유가족을 만났다. 3, 4세쯤 돼 보이는 고인의 아들은 행사장을 가득 메운 소방관들 사이를 뛰어다니며 ‘아빠’를 연방 외쳐댔다.
“그 모습이 얼마나 눈에 밟히던지…. ‘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까’를 몇 달 동안 고민하다 결국 적금통장을 만들었습니다.”
그 뒤 순직 소방관 소식을 접할 때마다 어린 자녀가 있는 유가족을 위해 적금통장을 만들기 시작한 박 소방교는 7년 가까이 매달 20여만원씩 이들을 위해 적금을 붓고 있다. “얼마 되지 않는 금액”이라며 멋쩍어하지만 이 금액은 그가 받는 수당의 40%다.
지금까지 적금을 수령했거나 매달 통장에 돈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는 유가족은 모두 다섯 가족. 처음에는 자신의 가족들에게까지 비밀로 했다는 박 소방교는 수당이 너무 빨리 떨어지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부인에게 4년 전 이 사실을 털어놓았다.
박 소방교는 “이제 정년이 10년 남았는데 그 때까지 가능하면 더 많은 유가족들을 돕고 싶다”고 말했다.
양평=이재명기자 egij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