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시행된 ‘마약법’ 단속에 걸린 한 아편 제조자 일당. 당시 궁핍했던 농민들은 양귀비 추출액을 응고시켜 쉽게 만들 수 있는 아편을 대량 생산해 도시민들에게 내다팔았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根絶 안 되는 아편환자…全國에 四萬餘名이 街頭를 방황
나중에는 처자까지 팔아먹고 패가망신을 한다는 아편. 이 무서운 아편중독 환자는 얼마나 되며 이들은 어떠한 계층에 속하는 인물들인가?
당국의 취체 결과에서 보면 중독환자가 전국에 약 四만명이나 있다고 한다. 중독환자 중에는 십五세의 소녀가 있는가 하면 六십七세에 달하는 노인도 있다. 그러나 四십세부터 五십세까지의 장년급이 가장 많은데 부녀자도 상당수에 달하고 있다.
전체 환자 중 약 四십 퍼센트는 서울을 중심으로 한 환자들인데 이 가운데는 소위 예술가도 한몫 끼어 있다. 환자들의 직업도 가지각색으로 유한급 무직자의 최고를 비롯하여 농민, 접객부, 상인, 근로자 등 순위이다.
▼戰後 사회불안이 아편중독자 양산
광복과 6·25전쟁 시기의 사회적 불안은 아편중독자를 양산했다. 보건후생부 통계에 따르면 1952년 2만8000여명이던 아편 상용자는 1956년 5만5000여명으로 늘어났다.
아편을 찾는 이가 급증한 것은 전쟁 중 부상자 치료 과정에서 아편이 진통제로 남용되면서 중독자가 많아졌기 때문. 아편이 널리 통용되던 중국에서 동포들이 대거 귀국한 것도 아편 사용을 부채질했다. 1958년에는 ‘코데인’이라는 기침약으로 가장한 아편 주사약이 공공연히 판매되면서 감기 치료를 받다가 아편에 중독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아편은 1800년대 말 중국에서 유입됐다. 외국 선교사들도 의료 목적으로 아편을 무책임하게 처방해 대한제국 말 상당수의 아편중독자들이 생겨났다.
일제 식민당국은 1910년대엔 아편사용을 단속했지만 1920년대 중반부터는 한국을 아편재배의 중심지로 활용하는 정책으로 전환했다. 일제 치하에서 대량제조 기술을 익힌 한국인 전문가들이 만든 아편은 1950, 60년대 아시아에서 최상 품질로 인정받았다.
1960년대 베트남전 파병으로 베트남산 아편이 대량 유입되기도 했지만 1970년대 이후 아편은 훨씬 효능이 강하고 투여방법이 간단한 합성마약에 밀려 세력을 잃어갔다. 2001년 경찰이 압수한 아편량은 218g. 반면 같은 해 히로뽕 압수량은 16만9500g에 이르렀다.
정미경기자 micke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