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츨라프 하벨 전 체코 대통령을 세 번 ‘만날 수’ 있었다. 한번은 만날 것을 못 만났고, 두 번은 가까이서 만났다.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시회는 연례행사의 하이라이트로 해마다 독일 서적상조합이 선정한 인사에게 평화상을 수여한다. 내가 이 전시회를 처음 찾은 것은 1989년 10월. 바로 그 해 프랑크푸르트 평화상 수상자가 체코의 반체제 극작가 바츨라프 하벨. 그러나 그는 가택 연금 상태여서 해외여행을 할 수 없었다.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당시 독일 대통령, 프랑스의 철학자 앙드레 글뤼크스만의 축사에 대해, 하벨의 답사는 독일의 저명한 배우 막시밀리안 셸이 대독했다. 그래서 하벨을 만나지 못했다.
▼민주화 혁명 이끈 반공주의자▼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나 프랑스 혁명 200주년이 되던 1989년 가을 유럽의 동부에서는 프랑스 혁명 못지않은 대혁명이 발발했다. 반세기 동안 세계를 양분했던 소비에트제국을 총체적으로, 그러나 평화적으로 붕괴시킨 민주화의 대혁명이.
이 혁명의 가장 극적인 사건은 극작가 하벨의 개인적인 삶에서 일어났다. 체코의 이른바 ‘빌로드혁명’은 연금 상태에 있던 한 작가를 하루아침에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추대되게 만든 것이다. 그 밑에서 부총리를 맡은 조제프 미크로슈코 박사와 나는 한 독일재단의 초청으로 같은 게스트하우스에서 지낸 인연으로 친구가 되었다. 그 덕분에 나는 1991년 말 대통령이 된 하벨과 그의 사저에서 한 시간 반쯤 대담할 기회를 얻었다.
이번에 그를 만난 것은 서울평화상 시상식에서였다. 정치적 이유가 아니라 건강상 이유로 서울에 오지 못한 하벨을 위해 프라하에서 시상식을 갖게 된 것이다. 병약해졌다고는 하나 하벨의 표정은 미모의 젊은 부인과 함께 매우 밝게만 느껴졌다.
하벨의 표정만 밝은 것이 아니라 프라하 시가의 모습도 옛날과는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밝아졌다. ‘몰다우 강변의 로마’라 일컬어지던 프라하는 반세기에 걸친 소비에트체제 하의 우중충한 땟물을 벗고 자본주의 세례를 10여년 받으면서 이제 옛날의 아름다운 ‘황금의 프라하’로 재생한 것만 같았다. 프라하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도시의 하나다. 심미적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역사적인 차원에서….
1990년대 초 나는 미크로슈코 박사를 초청해 1시간가량 TV 대담을 했었다. 그때 체코의 정변, 얀 마사리크 외무장관의 변사 등이 화제가 되자 이를 시청한 이승만 전 대통령의 미망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몹시 흥분하더라는 얘기를 그 후 들었다. 대한민국 건국전야, 1948년 당시 이 박사가 체코의 정변 소식에 비분강개하던 모습을 프란체스카 여사는 곁에서 지켜봤다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동유럽 제국이 소련 위성국으로 공산화되는 와중에 오직 체코슬로바키아만은 좌우합작을 통한 연립정부를 수립하고 있었다. 1918년 수립된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토마슈 마사리크의 아들인 얀 마사리크가 그 연정의 외무장관이었다. 그러나 연정의 실권을 장악했던 공산당이 1948년 봄 쿠데타를 일으켜 우파를 몰아내면서 얀은 집무실 창밖으로 내던져진 시체로 발견됐다.
한국의 1945년 직후 광복공간에서나, 어떤 의미에서는 ‘민족공조’를 새롭게 내세우는 오늘날에나 온건 중도파를 유혹하는 것이 정치이념적인 좌우합작 또는 좌우연립이다. 그러나 그 실체가 무엇인지 가장 선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 체코의 현대사다.
▼공산체제 평화적 해체의 교훈▼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두브체크의 개혁공산주의에 대해서도 전혀 환상을 갖지 않았던 하벨의 반공주의의 뿌리가 바로 체코의 현대사다. 더 놀라운 것은 그처럼 철저한 반공주의자 하벨이 민주화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면서도 그를 박해한 사람들에 대한 어떤 유혈의 보복도 없이 소비에트 체제를 평화적으로 해체했다는 사실이다. 한반도의 미래를 위해서도 가장 필요한 리더십은 통일에 못지않게 북한체제를 평화적으로 민주화할 수 있는 ‘해체의 영웅’이 아닌가 생각한다.
체코 프라하에서
최정호 객원大記者·울산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