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김치에 대해서 할 얘기가 많았다. 김치는 남자들의 수다를 위해서도 몹시 훌륭한 반찬인 듯. 왼쪽부터 이진혁 유희영 김형곤씨. 스타일링=박용일씨
《한국 김치는 지금 위기다. 몇 해 전 일본 기무치와 원조 논쟁이 벌어지더니 최근에는 김치 수출액이 중국에 추월당했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나라 안에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젊은 부부 치고 집에서 김치를 담가 먹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러다 집집마다 조금씩 다른 맛으로 전해지던 김치가 모두 사라지는 건 아닐까.
김치 종주국 위상은 이미 흔들리고 있다.
세 명의 젊은 남자가 모여 김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남자, 게다가 젊다. 김치와 전혀 안 어울리는 조합 같지만 나름대로 김치에 대해 할 말이 있는 사람들이다.
대학생 김형곤씨(24)는 인터넷(www.cyworld.com/adbada)에서 수많은 팬들을 확보하고 있는 신세대 요리 마니아. 유희영씨(32)는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퓨전 일식 레스토랑 ‘누보’의 셰프.
이진혁씨(34)는 ‘종가집김치’ 선임연구원으로 김치를 개발하고 평가하는 게 직업이다.》
○ 김치는 어렵다?
가정에서 아주 쉽고 간단히 담글 수 있는 김치를 하나씩 준비해서 인터뷰 장소로 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런 김치를 소개해서 김치 담그기 붐이라도 일었으면 좋겠다는 뜻이었다.
자취를 하면서 순전히 ‘살아남기 위해’ 음식을 만들기 시작한 김씨는 양배추김치를 들고 왔다. 그가 곧 펴낼 ‘총각 요리사 김형곤의 생존을 위한…’이라는 이름의 요리책에 등장하는 유일한 김치다. 파월 군인들이 향수병을 달래기 위해 베트남 현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인 양배추로 만들기 시작했다는 바로 그 김치.
김씨는 “자취하던 시절 김치가 먹고 싶은데 집에서 얻어오자니 ‘김치도 못 먹고 다니냐’며 걱정하실 것 같고 사먹자니 비싸서 직접 담그자고 나섰다”고 말했다. 양배추김치는 익기를 기다리지 않고 즉석에서 먹을 수 있다. 일단 담가놓고 보니 아삭아삭 씹히는 맛이 라면과 환상의 궁합이었다. 1시간이면 뚝딱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물러서 오래 두고 먹을 수 없는 게 걸리지만 독신자들에겐 흠도 아니다.
연구원인 이씨가 가져온 나박김치도 쉽게 만들 수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큰 줄거리만 얘기하면 ‘무와 배추 같은 재료를 손질한 후 소금물을 붓고 기다린다’는 게 전부다. 아직 미혼이라 그도 혼자 사는 처지다.
대학에서 식품공학을 전공한 이씨의 나박김치 예찬론.
“나박김치 국물이 비싼 돈 주고 사는 발효유보다 훨씬 몸에 좋다. 밭에서 나온 유산균이 듬뿍 들어 있다. 소의 장에서 나온 게 아니라 인간의 몸에서 나온 배설물이 거름이 되고 채소로 들어간 것이다. 아침에 국물 한 잔을 마시면 숙취나 변비를 해소하는 데 그만이다.”
○ 다양한 김치들
모든 김치가 다 쉬운 것은 결코 아니다. 제대로 된 배추김치만 해도 정말 어렵다고 다들 입을 모았다.
요리가 직업인 유씨도 “김치는 사실 자주 안 담근다”고 털어놓았다. 상대적으로 손이 덜 가는 오이소박이나 물김치, 백김치 정도만 담근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인터뷰 자리에 무려 세 가지 김치를 들고 왔다. 기본 메뉴로 가져온 ‘섞박 동치미’ 말고도 두 가지 독특한 김치가 더 있었다. 전문 조리사의 내공은 대단했다.
하나는 3일 정도 말린 대구의 배를 가른 후 김치를 넣어 실로 묶은 것. 이름 하여 ‘대구속박이 김치’쯤 될까. 유씨는 “이 자체로도 훌륭한 김치라고 할 수 있는데 사실은 그대로 냄비에 넣어 찌개를 끓이면 맛있겠다 싶어 가져왔다”고 말했다.
또 하나 감이 주재료인 물김치는 원래 사찰에서 간식으로 먹던 것이라고 한다. 보통 숯과 짚, 댓잎 등을 넣어 발효시킨다고 하는데 그는 계핏가루로 수정과 비슷한 느낌을 냈다. 식당에서 디저트로 가끔 내놓는데 반응이 꽤 좋다고 했다.
김씨는 “김치의 종류가 100가지도 넘는 것을 보면 먹을 수 있는 모든 식물이 다 김치의 재료가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 공장 김치를 넘어서
인터뷰 도중 유씨가 묵은 김치 얘기를 꺼내자 다들 침이 꼴깍 넘어가는 눈치다. 인터뷰를 앞두고 생각해봤다는 김치 응용 요리다. 3년쯤 묵은 김치를 물로 씻어 양념을 해서 펼쳐놓은 다음 생선회를 역시 양념에 무쳐 가운데에 얹고 김치로 덮어 낸다는 것이다. ‘묵은 김치를 이용한 회 무침’ 정도가 되겠다.
묵은 김치 얘기가 나오자 다들 할 말이 많아보였다. 이런 게 김치의 힘이다. 김씨는 “따뜻한 밥에 얹어 먹는 묵은 김치 한 조각, 으∼”라며 몸을 떨었다. 연구원 이씨는 “묵은 김치를 찾는 사람이 많아서 포장해 파는 김치 가운데에도 1년 묵은 김치를 제품으로 만든 게 있다”고 거들었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김치는 지방마다, 아니 집집마다 만드는 법이 조금씩 다르다. 공장에서 김치를 대량 생산할 땐 어느 김치가 기준일까. 모두의 이목이 이씨에게 쏠렸다.
“이건 비밀인데”라며 이씨가 입을 열었다. 인구가 가장 많은 수도권을 겨냥한 김치를 만든다고 했는데 돌려 말하면 서울 토박이인 자신의 입맛에 맞는 김치를 개발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치를 사서 먹는 게 큰 물결인 현실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국의 다양한 김치들이 그대로 사라지는 게 아닐까. 그는 ‘종가집김치’(www.chongga.com)가 이달 말까지 김치 맛있게 담그는 제조비법을 찾는 행사를 벌이고 있다고 소개했다. 공장 김치나마 좀 더 다양하게 만들기 위한 노력이라는 것이다.
▼남자도 손쉽게 만들 수 있는 별미김치 3선▼
○ 나박김치 (이진혁씨)
▽재료=배추 8분의 1개, 무 8분의 1개, 쪽파, 미나리, 당근, 배 약간, 양념(다진 마늘 2 작은술, 다진 생강 1작은술, 고춧가루 2작은술, 설탕 1작은술)
만드는 법
1. 배추와 무, 쪽파, 미나리를 3cm 간격으로 썰어 준비한다.
2. 당근과 배도 비슷한 크기로 준비한다.
3. 마늘과 생강, 고춧가루는 가제나 면포 등에 싼다.
4. 적당히 간한 소금물(약 2%) 4컵에 재료와 양념을 넣고 하루 정도 베란다에서 익힌 후 냉장고에 넣어 다음날 먹는다.
▽추천자 한마디=익으면 국물에 소면을 말아 먹어도 좋고 목이 마를 땐 그냥 마셔도 그만이다.
요즘엔 고구마와 나박김치를 같이 먹으면 정말 맛있다.
○섞박동치미 (유희영씨)
▽재료=총각무 1단, 배추 2포기, 붉은 고추 5개, 대파 5뿌리, 마늘 10쪽, 생강 2분의 1개, 소금, 청각
▽만드는 법
1. 무는 두 쪽, 배추는 네 쪽으로 쪼개 소금물에 숨을 죽인다.
2. 쪼갠 배추 안쪽에 무, 고추, 마늘, 생강, 파를 넣고 반을 접은 뒤 배추 겉잎으로 감싸 속이 흘러나 오지 않게 하고 항아리에 담는다.
3. 무거운 돌로 눌러놓고 하룻밤을 재운다.
4. 다음날 물 3L에 소금 20큰술을 넣어 소금물을 만들고 배와 양파를 갈아 즙을 내 섞는다. 설탕도 조금 넣는다.
5. 소금물을 붓고 찬 곳(0도 정도) 에서 1개월 이상 익혀 먹는다.
▽추천자 한마디=백김치(사진)와 동치미를 합친 다목적 김치. 격식을 차리는 자리에 내놓아도 전혀 손색없다.
○ 양배추김치 (김형곤씨)
▽재료=양배추 2분의 1통, 무 4분의 1개, 실파 6뿌리, 양념장(액체육젓 4큰술, 고춧가루 3분의 1컵, 마늘 6쪽, 생강 1쪽, 설탕 2큰술, 소금과 깨 약간)
▽만드는 법
1. 양배추는 한입 크기로, 무는 납작하게, 실파는 5cm 길이로 썬다.
2. 소금물(소금 4큰술, 물 8큰술)을 간간하게 만들어 재료를 2시간 동안 절인다.
3. 고춧가루에 육젓을 넣어 불린 후 다진 마늘과 생강, 설탕, 소금, 통깨를 넣어 양념장을 만든다.
4. 소금물에 절여둔 재료를 체에 밭쳐 물기를 뺀다.
5. 재료에 양념을 넣고 버무린 후 냉장고에 보관한다.
▽추천자 한마디=많이 만들면 후회한다! 조금 만들어 맛있을 때 다 먹는 게 제일 좋다.
글=홍석민기자 smhong@donga.com
사진=강병기기자 arch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