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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 산책]‘S다이어리’… ‘섹스 일기장’의 엽기 복수

입력 | 2004-10-21 16:41:00


지니(김선아)는 찬(장혁)과의 만남 1주년 기념일에 청천벽력처럼 이별을 통보받는다. 하지만 자신의 헌신적 사랑방식을 믿는 지니는 세 남자를 회상한다. 내성적인 과외교사였던 구현 오빠(이현우)와의 첫사랑, 터프한 대학선배 정석 오빠(김수로)와의 두 번째 사랑, 섹시한 연하 유인(공유)과의 세 번째 사랑. 이들을 찾아간 지니는 사랑의 진실을 확인하려 하지만, 세 남자 모두로부터 냉담한 반응을 얻는다. 지니는 다이어리를 뒤져 성관계 장소와 횟수 등을 깨알같이 적은 배상청구서를 이들 각자에게 보낸다. 지니의 복수가 시작된다.

‘S다이어리’는 섹스(Sex), 시크리트(Secret·비밀), 스페셜(Special·특별한), 스위트(Sweet·달콤한)와 같은 관능적인 단어들을 일컫는 ‘S’를 화두로 세웠다. 하지만 정작 이 영화의 핵심을 관통하는 알파벳은 ‘캐릭터(Character)’와 ‘캐스팅(Casting)’이란 두 단어를 나타내는 ‘C’다.

‘S다이어리’는 김선아와 3명의 남자배우를 캐스팅해 그들이 가진 검증된 이미지를 극중 캐릭터로 고스란히 옮겨놓는다. ‘푼수 같고 헌신적이지만 버림받는’ 이미지의 김선아, ‘어눌해서 매력적인’ 이현우, ‘강하고 능청맞은’ 김수로, ‘섹시하고 자유로운’ 공유가 그들이다. 영화는 김선아와 남자배우들을 차례로 조합하며 세 편의 콩트를 나열한다. 이 영화는 웃음을 이끌어 가는 책임과 권한을 정확히 3등분함으로써, ‘홈런’을 날리기보다는 대과(大過) 없이 기본 흥행성적은 올리겠다는 ‘포트폴리오’ 전략을 구사한다.

이런 ‘안전운행’ 전략은 실패하지 않았다. ‘S다이어리’는 관객이 기대한 ‘딱 그만큼’의 연기와 웃음을 보여준다. ‘딱 그만큼’의 관객몰이에도 성공할 것으로 보인다. 김선아의 적당한 노출과 함께 “합체!”를 외치며 ‘도킹’하는 유머러스한 베드신도 눈요깃거리로 넣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문제점이 하나 있다. 캐릭터와 캐스팅과 반짝이는 아이디어는 있되, 정작 ‘이야기’가 없다는 점이다.

‘S다이어리’는 내밀해 보이는 제목과 달리, 주인공 지니에게 일어나거나 혹은 지니가 벌이는 사건들에 밀도 있는 개연성이 없다. 이 영화에 웃기는 ‘장면’은 있으나 웃기는 ‘상황’이 없는 건 이 때문이다. 지니의 복수극으로 접어드는 중반 이후 이 현상은 더 심각해진다. 신부(神父)가 된 구현 오빠에게 비아그라를 몰래 먹여 시도 때도 없이 발기시키고, 경찰이 된 정석 오빠의 차에 마구잡이로 낙서하고, 유인의 집 소파 틈새에 콘돔을 숨겨놓아 엄마에게 발각되도록 하는 비현실적이기 짝이 없는 복수 프로그램을 나열하며 영화가 ‘웃기지? 웃기지?’를 연발하는 동안, 지니가 절박한 현실 속에서 이야기하려던 ‘연애성장기’는 슬그머니 말라죽는다.

이야기의 현실성을 도외시하는 이 영화는 결국 2개의 치명적 자기모순을 드러낸다. 하나는 특별하고 내밀한 얘기를 할 것만 같던 지니가 느닷없이 세상의 모든 ‘버림받은 여자’를 대변하는 응징자로 변신하는 데서 오는 개별성과 보편성의 충돌이다. 또 다른 하나는 툭하면 (합의 하에) 섹스하고 함께 목욕도 하며 즐길 것 다 즐겼던 지니가 남자에게 결과적으로 버림받았다는 이유만으로 ‘공짜 섹스를 배상하라’며 이미 헤어진 지 한참이 지난 그들에게 협박성 고지서를 날리는 표리부동함과 피해망상증이다. 2004년 10월 22일 개봉하는 이 영화가 기실은 1970년대 통속 멜로물의 ‘정 주고 마음 주고 몸 주니…’식 단골정서와 피학적 여성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스스로 말하는 셈이다.

김선아, 이현우, 김수로는 여전히 재미있다.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을 지금의 자리에 올려놓은 고유한 이미지가 어느새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지는 않은지 한번쯤 생각해 볼 시점이다. 권종관 감독의 장편 데뷔작. 15세 이상 관람 가.

이승재기자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