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김수환 추기경 “언론이 비판해야 정치가 바로 선다”

입력 | 2004-10-24 18:30:00

김수환 추기경은 “언론이 비판적 목소리를 내야 정치도 바로 선다”며 “대한민국이 양극단으로 분열되고 북한까지 개입하게 되면 엄청난 시련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을 때때로 염려한다”고 말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23일 오전 서울 종로구 혜화동 가톨릭대 주교관에서 기자와 만난 김수환(金壽煥·82) 가톨릭 추기경은 헌법재판소 결정의 승복 문제에서 시작해 정부 여당이 추진하는 4대 법안에 대한 견해,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에 대한 개인적 조언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한 시간여 동안 차분한 어조로 말해 나갔다.

김 추기경은 먼저 정부 여당의 헌재 결정 승복을 조언한 뒤 “권력을 쥐면 오만해지는 것이 권력의 속성이요 유혹인 것 같다”며 지난해 노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소개했다.

“대통령께서 취임 반년 뒤에 저와 강원용 목사님, 송월주 전 조계종 총무원장님을 초대해서 식사를 함께 한 적이 있어요. 그때 제가 ‘그들(동아와 조선)을 껴안아라. 그렇게 하는 것이 훨씬 더 보기 좋고, 그 신문들도 정부 정책에 협조할 것이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대통령께서 ‘저는 약자입니다. 그건 강자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약자인 저는 그렇게 못합니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힘들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김 추기경은 이렇게 말하면서 “(지금의 상황이) 대화가 안 되고 (대통령은) 자기 신념대로만 끌고 가니까 극과 극으로 분열되고 끝내 북한까지 개입한다면 우리 모두가 엄청난 시련을 겪을 수 있다는 점을 때때로 염려한다”고 말했다.

김 추기경은 또 노 대통령에 대해 “대통령의 입지전적인 삶은 우리 사회 젊은이에게 희망을 주고 또 정치도 잘 할 수 있는 바탕이 되는데 어떻게 해서 계속 편 가르기만 하는지 굉장히 아쉽다”고 말했다. 그는 “대통령께서 이렇게 편을 가르고 싸우면 국력 낭비일 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손실”이라며 “대통령을 보필하는 사람들이 그런 (편 가르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고 우려했다.

김 추기경은 또한 신문 3개사의 점유율을 60% 이내로 제한하는 것을 골자로 한 정부 여당의 신문법안에 대해 “권력을 잡으면 (언론을 통제하려는) 그런 유혹을 받는 것 같다”며 “나도 개인적으로 동아일보 애독자지만 동아일보가 (정부에 대해) 과하게 한다는 느낌은 별로 받은 적이 없다. 언론은 사회의 목탁으로서 비판적 목소리를 내야 정치가 바로 서고 국민에게도 희망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가톨릭 주교회의가 반대의 뜻을 밝힌 사립학교법안에 대해서는 “그동안 설립자측의 폐단이 있을 수 있고 또 많은 사학재단이 비난을 받아 온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사립학교가 교육에 이바지한 측면이 크다”며 “사학의 잘못은 시정하되 사학의 정신을 살리는 것이 학교와 교육을 위해 모두 좋다”고 밝혔다.

최근 국가보안법 폐지에 반대한다는 뜻을 밝힌 김 추기경에 대해 교계 안팎에서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이에 대해 그는 “요즘 팔목이 아파 인터넷을 하지 못해 어떤 말들이 돌아다니는지 잘 모르겠다”면서 “국가보안법 폐지는 시급하지 않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부터 실제 적용사례는 계속 줄고 있는 걸 보면 운용을 잘 하면 된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까지 어딜 가든 칭찬만 받아 어떤 때는 ‘나를 우상으로 만들려고 하는구나’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며 “그런데 이렇게 비판을 받으니 내가 교만해지지 않도록 하려는 뜻이라는 걸 알고 오히려 고맙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한편 김 추기경은 최근 인터넷에 일제강점기 말 학병으로 나갔던 자신의 군복 입은 사진이 ‘친일파’라고 불리며 돌아다니고 있다면서 “허허” 웃었다. 노엽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여러 번 들어서 별로 노엽지 않다”고 답했다.

김 추기경이 일본 조치(上智)대 유학시절이던 1944년 일제는 학병 지원을 강요하며 그가 소속됐던 대구교구의 교구장을 매일 괴롭혔고 그의 집에는 “식량배급을 끊겠다”고 협박했다. 결국 당시 대구교구장은 김 추기경에게 ‘학병에 지원하라’는 전보를 보냈고 김 추기경은 ‘주교에 순명하라’는 가톨릭 법에 따라 학병을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살아보지 않은 사람이 그 시대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는 어렵다”며 과거사 문제를 이야기했다. 그는 “정부가 과거사 문제를 거론하는 동기가 순수하다고 할는지 모르지만 나는 독선적 자세가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는다”며 “이런 식으로 해서는 다음에 정권을 잡은 사람이 또 다시 (과거사를) 정리하자고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김 추기경은 자신이 1969년 추기경이 된 후 아직까지 한국에서 다른 추기경이 나오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지난해 새 추기경을 선임할 때 로마 교황청에 가서 책임자인 이탈리아 추기경에게 ‘이탈리아에서야 추기경이 한 명 더 생기는 것이 큰 의미가 없겠지만 한국에서는 정말 커다란 의미가 있다’고 말했어요. 또 교황님께도 말씀을 드렸는데 말없이 미소만 지으셨습니다.”

그는 한국보다 추기경 배출이 늦었던 베트남이 이후 추기경들이 사망하면서 후임이 계속 선정돼 지금까지 5명이나 배출됐다는 사례를 소개하며 “내가 너무 일찍 추기경이 돼 아직 살아있는 것이 ‘화(禍)’인 것 같다”며 엷은 웃음을 지었다.

김 추기경은 마지막으로 “신앙이란 하느님이 자신을 언제나 사랑하고 계시다는 믿음”이라며 “하느님은 애국가에도 나오듯 대한민국을 보우하고 계시지만 인간은 미련해서 시련을 겪지 않으면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 한국의 상황이 하느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는 어려운 시기인 것 같다”며 “가톨릭 신자로 세례를 받았지만 성당은 다니지 않는다는 노 대통령이나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에게 특별히 하느님께 의탁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민동용기자 min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