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박순철
좌우에 있던 장수들이 한꺼번에 나서 패왕을 말렸다. 군율을 세우는 데는 엄하지만 자신이 곁에 두고 부리던 장졸에게는 곧잘 정에 약해지는 패왕이었다. 못 이기는 척 그 기장(騎將)을 용서하면서도 제 속을 이기지 못해 주먹을 부르쥐었다.
“전횡(田橫) 그 겁 없는 촌놈이 제 형을 따라 죽기를 재촉하는구나. 이제부터 전군은 일정(日程)을 배로 하여 성양으로 달려간다. 가서 성을 우려 빼고 전횡을 사로잡아 목을 베리라. 성안의 목숨 있는 것은 모두 죽이고 성은 허물어 평지를 만들리라!”
그리고는 장졸들을 휘몰아 성양으로 달려갔다. 범증이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성안에서 평안히 쉬며 기다리고 있는 적을 고단한 군사로 쳐서는 이기지 못합니다. 적은 어차피 성에 의지해 우리에게 맞설 것이니 서두르지 마십시오.”
범증의 말이라 못 들은 척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패왕은 급한 마음을 이기지 못했다. 사마 용저(龍且)와 정공(丁公)을 불러 3만 군사를 떼어주며 말했다.
“너희들은 밤을 낮 삼아 달려 먼저 성양으로 가라. 멀리서 에워싸고 전횡이 달아나는 걸 막고만 있으면 곧 내가 이끈 대군이 그곳에 이르러 한 싸움으로 성을 우려 빼리라!”
하지만 그 같은 패왕의 서두름이 다시 화근이 되었다. 용저와 정공이 먼저 떠난 다음날 아침이었다. 아직 성양이 70리나 남은 곳에 이르렀을 때 패왕은 다시 분통 터지는 꼴을 보아야 했다. 전날 밤낮을 달려 성양 성밖 30리 되는 곳까지 밀고 들었던 용저와 정공이 전횡의 군사들에게 야습을 받아 되쫓겨 온 일이었다.
전영조차 여우 대접도 안 해준 패왕의 도저한 자부심에 그 아우 전횡은 쥐새끼나 다름없이 하찮아 보였다. 용케 성양을 차지하기는 해도 성안에서 벌벌 떨며 기다리고 있을 뿐, 감히 성을 나와 매복하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런데도 성밖 30리나 나와 용저 같은 맹장이 이끄는 3만군을 형편없이 짓두들겨 내쫓아 버린 것이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
성을 내기에 앞서 궁금함부터 풀어볼 양으로 패왕이 용저에게 물었다. 언제나 곁에 두고 아끼는 장수라 그 목소리도 우선은 담담했다. 용저가 얼굴을 붉히며 더듬거렸다.
“전횡과 전기가 각기 한 갈래 군사를 이끌고 매복해 있다가 칠흑 같은 여명에 불시에 기습해 왔습니다. 놀란 군사를 수습해 맞받아치려 했으나 군사들이 워낙 지쳐 있어 뜻과 같지 못했습니다.”
“너는 나를 따라 싸운 것만도 대소 쉰 번이 넘는다. 밤중에 행군하면서 척후도 보내지 않았단 말이냐?”
“전횡 같은 것이 감히 성을 나와 매복을 펼칠 줄은 차마 몰랐습니다.”
용저가 더욱 낯을 붉히면서도 분하다는 듯 지그시 이를 사려 물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약점에 관대하기 마련인가, 그런 용저의 말을 듣자 패왕도 더는 꾸짖지 않았다.
“제나라 촌놈에게도 배울 것이 있구나. 알았다. 이제부터 내 너를 한 장수로 여겨주마.”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거기서 대군을 쉬게 하고 다시 한번 싸울 채비를 단단히 갖추게 했다. 전횡을 다시 보게 되었다기보다는 그가 결코 성양을 버리고 달아나지 않으리란 확신을 얻었기 때문이라 보는 편이 옳다.
글 이문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