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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영화파일]‘비키퍼’의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

입력 | 2004-10-28 16:13:00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의 '비키퍼' -사진제공 백두대간


상영시간 122분에 대사 분량은 A4 용지로 아홉 페이지가 채 되지 않는다. ‘비키퍼(Bee Keeper)’는 그만큼 말이 없는 영화다.

느린 화면, 긴 침묵. 그래서 이 영화를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침묵의 3부작(‘안개 속의 풍경’ ‘시테라 섬으로의 여행’) 가운데 하나로 꼽는 것일까? 종종 유장한 느낌의 풀샷, 롱테이크를 구사하면서 앙겔로풀로스는 고단한 역사의 여행길로 다시 한번 우리를 인도한다. 거의 20년 전인 1986년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서는 이상하게도 통시성(通時性)이 느껴진다. 옛날 작품이지만 지금의 우리들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세상은 변화하고 진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과정의 짧은 단층 사이사이에서 사람들은 역사적 반동과 끊임없는 갈등을 겪는다. 사회는 다시 퇴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진통은 꽤나 아프다. 앙겔로풀로스는 그 진통을 겪었다. 우리 역시 지금 똑같은 아픔을 겪고 있다. 지금 다시 그의 작품을 찾게 되는 것은 그의 작품들이 갖고 있는 ‘역사적 시의성’ 때문이다.

사랑하는 딸을 시집보내고 학교에서 정년퇴임한 스피로(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는 가업인 꿀벌치기를 위해 길을 떠난다. 그에게 이제 남아 있는 것은 초라한 벌통과 죽음을 앞둔 친구들, 그리고 외로움에 지쳐가는 자신의 늙은 육신뿐이다. 어느 날 밤 그는 육감적인 한 소녀를 자신의 꿀벌 트럭에 태우게 되고, 이날을 계기로 점차 소녀를 향한 격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사랑도 추억도 믿지 않고 찰나의 쾌락에 몸을 맡기며 살아가는 소녀. 어린 아이에 대한 스피로의 열정은 결국 파국을 맞게 된다.

언뜻 줄거리만으로 볼 때 ‘비키퍼’는 스러져 가는 황혼의 인생을 살아가는 한 노인의 가슴속 스산한 풍경을 그려낸 듯 보인다. 하지만 평생을 날카로운 역사의식의 칼날을 품에 안고 살아 온 앙겔로풀로스를 생각하면 그리 단순한 내용으로 받아들여지지가 않는다. 혹시 이 영화를 통해 그는 사멸해 가는 사회주의의 순수성에 대한 회한과 아픔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

주인공 스피로의 지치고 늙은 육신의 모습처럼 많은 사람들이 이상으로 동경해 왔던 사회주의가 이제는 생명을 다한, 낡은 이데올로기로 전락한 것이 아니냐는 쓸쓸한 고백을 담아내고 있는 듯하다.

이 작품보다 우리에게 먼저 소개된 1995년 작 ‘율리시즈의 시선’에서도 앙겔로풀로스는 비슷한 고백을 하고 있다. 이 영화의 후반부에 나오는 장면이야말로 그의 역사인식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바지선에 실려 어디론가 흘러가는, 조각난 레닌 동상을 향해 강둑에 선 사람들이 마지막 경례를 한다. 거의 정지 상태에 가까울 정도로 극단적으로 느리게 이어지는 카메라의 움직임과 침묵의 장면만으로 앙겔로풀로스는 사회주의의 ‘사망’에 대한 사람들의 서글픈 통곡을 크나큰 울림으로 담아냈다.

‘비키퍼’와 ‘율리시즈의 시선’ 중간쯤에 놓여 있는 1988년도 작품 ‘안개속의 풍경’에서는 어머니가 만들어 낸 거짓말만 믿고 아버지를 찾아 무작정 가출한 두 어린 남매의 애처로운 모습이 펼쳐진다. 이 어린 남매가 찾고 있는 것은 아버지일까, 아니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자취를 감춘 사회주의의 역사인식일까. ‘안개 속의 풍경’은 이념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사회의 강고한 억압기제가 순수한 ‘어린’ 영혼들을 어떻게 짓밟는가를 웅변해내는 작품이다. 영화 후반부, 트럭 안으로 끌려 들어가 어린 누이가 강간을 당하는 롱테이크 장면은 영화 역사상 가장 잔혹하고 슬픈 장면으로 꼽힌다.

이 혹독한 첨단 자본주의의 시대에 앙겔로풀로스의 ‘비키퍼’를 만나는 것은 매우 슬프면서도 인상 깊은 경험이 될 것이다. 그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왜곡된 세상을 향해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는 한 지식인의 표정이 떠오른다. 그의 그런 비관적인 세계관에 몹시도 우울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망가져가는 세상이긴 해도 끝까지 그 옆을 지키려는 비장함이 느껴져 마음 한 구석에서 큰 울림이 일어난다.

세상은, 어쩌면, 단 한 사람의 의인 때문에 구원된다. 그리스의 거장 테오 앙겔로풀로스에게 경의를! 27일 개봉. 18세 이상 관람 가.

오동진 영화평론가 ohdjin@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