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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악성 리플 휘갈기며

입력 | 2004-10-28 17:13:00

그래픽 이진선기자


《저질 기사를 썼으니 저질 리플은 당연하지….

농대하니까 생각이 나는데…, 모 연예인이 ○대 농대 나왔다고 공부 잘했다고 말할 땐….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농대는 반에서 40등 하는 사람이 가고 그랬죠.

○○○ 팬인데 (리플이) 너무하네요.

나도 ○대 농대 나왔는데….》

위에 나온 글들은 인터넷 수능 사이트 게시판도 아니고 모 대학 농대사이트에 올라온 글도 아니다. 최근 결혼한 모 방송국 아나운서의 인터뷰 기사 아래에 달린 댓글들.

네티즌이 만든 악플을 경고하는 게시물. 건전한 인터넷 문화와 표현의 자유 속에서 악플에 대한 논란도 커지고 있다.

500여개가 넘게 달린 댓글 중 상당수가 이런 엉뚱하고도 인신공격적인 내용들이다.

이른바 ‘악플(악성 리플)’.

인터넷상의 댓글 중 정도나 내용이 심한 것들을 통칭하는 말. 요즘 악플이 인터넷의 일부로 자리 잡으면서 일부 악플러(악플을 쓰는 사람)가 인터넷 검색어에서 상위에 오를 정도로 관심을 끌고 있다.

○ 악플의 역사

넓게 보면 ‘악플’이란 반드시 게시글에 대한 ‘리플’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게시물 자체가 될 수도 있고 글이 아닌 패러디한 이미지가 될 수도 있다.

물론 대부분은 내용도, 표현도 저급한 단순 리플들. 하지만 그중에서도 나름대로 촌철살인의 풍자, 독특한 자신만의 어투, 냉소적인 내용 등이 있는 악플들은 네티즌 사이에서 화제가 되기도 한다.

이 일부 악플의 내용과 표현을 네티즌들이 따라하면서 일종의 인터넷 언더그라운드 문화를 형성하기까지 한다.

최근 관심을 끌고 있는 ‘싱아형’은 이런 뛰어난(?) 악플 문화의 대표주자. ‘싱아’라는 필명의 네티즌이 이소룡 얼굴을 합성한 사진에 ‘형이다. 형은∼’으로 시작하는 악플을 자주 올려 ‘싱아형’으로 불린다. 그의 어투는 ‘싱아어록’까지 생길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으며 최근 인터넷 검색어 순위에서 3위에 오르기도 했다.

필명 ‘××교황’의 경우 유명 사이트 게시판마다 온갖 악의적인 글을 지속적으로 달아 유명해진 네티즌.

그의 글은 차마 옮길 수 없을 만큼 욕설이 난무하지만 개중에는 인터넷 유머코너에서 베스트 유머로 선정될 만큼 화제를 낳기도 했다.

일부 악플러의 특정 표현들은 유행을 낳기도 한다. 상대방과 대화 도중, 또는 게시물 댓글에 무조건 ‘고구마 장사가 힘들어요. 100원만 주세요’라고 몇 개씩 쓰는 것이 그것.

밑도 끝도 없는 어처구니없는 표현이지만 네티즌 사이에는 유행어처럼 번지고 있다.

패러디에 가깝지만 ‘을룡타’도 인터넷을 휩쓴 악플. 지난해 12월 일본에서 열린 동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에서 이을용 선수와 몸싸움에서 넘어진 중국선수가 오버 액션을 하자 분노한 네티즌들이 화면을 갖가지 모습으로 패러디해 전파시켰다. 중국을 겨냥한 악플이다.

○ 악플은 행위 예술?

대개의 네티즌들은 악플러에게 탐탁지 않은 시선을 보내지만 일부에서는 “비난이 있지만 악플은 일종의 행위예술”이라고 당당히 주장한다.

유머, 풍자와 냉소로 이뤄진 일종의 언어 행위라는 것이다.

한 네티즌(필명 루리코)의 경우 “한일 문제가 논란이 됐을 때 일본인이 작성한 ‘사죄는 하지만 보상은 하지 않습니다’란 광고 패러디 리플을 본 적이 있다”며 “악성 리플들이 많기는 하지만 뛰어난 악플은 나름대로의 마니아를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네티즌도 “독설이라는 점에서 악플은 분명히 읽는 재미가 있다”며 “중요한 것은 단순 욕설, 비방 리플이 자연스럽게 ‘읽을 만한 악플’을 탄생시켰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스스로 ‘악플 마니아’라고 지칭하는 아이디 taejung○○은 “게시물이나 리플을 봤을 때 순간적으로 드는 느낌을 그대로 표현한 것일 뿐”이라며 “욕이나 저급한 말을 쓰기는 하지만 밑바닥 문화라는 것도 존재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하지만 악플을 한번이라도 당해본 사람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아이디 sh83109는 “대통령 탄핵과 관련한 토론방에 개인의견을 올렸다가 악플만 200여개가 넘게 달린 적이 있다”며 “대부분 반대의견을 가진 사람들의 욕설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몇 번 반박의견을 올렸지만 논리와 관계없는 악플만 난무해 토론을 포기했다”며 “글이기는 하지만 심한 욕을 들었을 때는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아이디 Idaism도 “악플이 하나의 문화라는 것은 궤변”이라며 “악플러들은 당하는 사람의 입장도 생각해야 한다. 심한 악플 때문에 인터넷 사이트가 황폐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일부 사이트나 코너에서는 여자의 입을 지퍼로 채운 사진이나 ‘악플 달면 생매장’, ‘악플 반사’라는 경고도 하지만 별 소용이 없는 상태다.

○ 악플러를 잡아라

악플의 범위를 정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원 글 내용과 관계없이 ‘앗싸 1등이다(리플 중 제일 처음에 썼다는 말)’만 달고 가는가 하면 심하면 욕설, 음란성 리플도 있기 때문.

이 때문에 각 포털사이트에서는 나름대로 기준을 세워놓고 모니터링을 하는 등 악플을 차단하려 노력하고 있지만 쉽지는 않다.

프리챌측은 “심한 글의 경우 삭제 또는 수정 건의를 하지만 쉽지는 않다. 또 전혀 엉뚱한 글을 써놓는다고 다 삭제할 수 있겠느냐”며 “완전한 욕설 비방이 아니라면 어느 정도 용인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네이버측도 “실명제, 금지어 설정 등 방법을 써봤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며 “억지로 제재하기보다 자연스럽게 자체 정화를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고 말했다.

포털사이트 다음은 사이트 내에서 나름대로 논리를 갖추거나 좋은 글을 쓴 네티즌을 아예 일정 코너의 논객으로 등록시키는 방법으로 자연스럽게 논쟁하고 토론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고 있다.

이진구기자 sys120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