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계에 전해오는 금언이 있다. ‘귀명창이 명창을 낳는다.’ 우리가 가진 독보의 음악적 재보(財寶)로 자랑할 만한 판소리의 역사에는 문자 그대로 피나는 수련을 거쳐 득음(得音)한 전설적인 명창들의 계보가 맥맥(脈脈)하다. 그런데 그 명창들을 낳은 바탕에 ‘귀명창’들이 존재한다. 귀명창이란 이 재미있는 조어(造語)는 판소리의 맛과 멋을 제대로 음미할 줄 아는 훌륭한 청중을 가리킨다. 가짜와 진짜, 미숙한 것과 성숙한 것, 음악적 경지의 높낮이를 변별할 뿐 아니라 그 음악적 경지의 근본이 되는 삶에 대한 성찰까지 간파하는 수준 높은 청중, 그 익명의 대중에 의해 판소리는 지지돼온 것이다.
▼훌륭한 청중이 명창 만들어▼
‘일고수(一鼓手) 이명창(二名唱)’이란 말도 있다. 소리하는 명창보다 북 치는 고수가 우선이라는 점을 이른 것이다. 고수는 반주자로서 소리판에서 어디까지나 부차적 존재로 보인다. 실제로 예전에는 고수를 하대하는 일이 많았고, 이에 격분해 북을 내치고 소리광대로 나선 고수들도 적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런데 명고수는 단지 반주자에 그치지 않고 소리를 이끌어간다. 그는 지휘자요 해석자이자 비평가로서 명창과 청중 사이를 매개한다. 귀명창이 아마추어 비평가라면 명고수는 전문적 비평가라고 할 수 있는데, 전문 비평가란 수준 높은 청중의 다른 이름이다. 판소리계에 전해지는 이 지혜로운 금언들은 위대한 예술의 탄생에 청중의 양과 질이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를 명쾌하게 지적한 것이다.
얼마 전 베네치아에서 이런 청중을 만났다. 한국과 이탈리아 수교 120주년을 기념해 카포스카리 베네치아대가 주최한 ‘제1회 한국 이탈리아 시 포럼’에 참석한 베네치아 청중의 그 놀라운 경청은 차라리 감동적이었다. 일찍이 동방무역을 개척하여 번성했던 이 도시의 전통을 이은 베네치아대는 이탈리아 최고의 동방학 중심이다. 그러나 그런 베네치아와 대학에서도 중국학이나 일본학의 두터운 축적에 비할 때, 이제 막 태동하기 시작한 한국학은 아직 낯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교수에서 젊은 학생에 이르기까지 이틀에 걸쳐 이루어진 긴 행사에 그처럼 열심히 참여할 수 있다니, 베네치아의 위대한 예술은 바로 이 뛰어난 귀명창들에 의해 건설된 것임을 나는 절감하였다.
한국어가 베네치아의 청중을 매료시킨 데에는 이 포럼에 참석한 고은(高銀) 정현종(鄭玄宗) 두 시인의 현전(現前)에 힘입은 바 크다. 특히 고은 시인의 낭송은 일품이었다. 이 포럼과 함께 열린 이현 화백의 전시회도 돌연한 한국어 붐을 도왔다. 베네치아 청중의 두 시인에 대한 경의를 지켜보면서 나는 한국 현대시의 수준을 가만히 가늠하였다. 시가 죽어가는 서구사회에 비할 때 한국에서 시는 살아 있다. 간난(艱難)의 한국현대사를 딛고 그 고통의 현실을 영롱한 시의 이슬로 내린 한국 현대시가 죽은 시인의 사회, 서구의 영혼을 일깨우는 현장을 목격하면서 나는 새삼 한국 현대시를 이 수준으로 들어올린 한국 독자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주장만 난무하는 정치현실 우울▼
고된 여정에도 행복에 겨웠던 것도 잠시, 귀국 비행기에서 얻어 본 한국 신문은 살벌한 한국소식들을 대문짝만하게 전해준다. 온갖 쟁점들을 둘러싸고 정치가들의 말이 어지러이 춤춘다. 신문 방송은 정치판의 편먹은 말들을 중계방송만 하는 게 아니라 덧붙여, 논평하고 주장하고 비난하고 옹호한다. 고명한 교수님들도 신문 방송에 납시어 편먹고 상대를 비난한다. 누리꾼(네티즌)들 또한 난리다. 소통되지 않는 말들이 공중에 자욱하다. 누구도 귀명창이나 고수가 되려 하지 않고 모두 소리광대로만 나선다. 귀명창이 사라진 우리 시대의 우울한 풍경을 넘어설 길은 정녕 없는가. 부유(浮遊)하는 말들의 진위를 따지고 그 성심을 가리고 실천으로 이동할 말의 줏대를 세울 귀명창의 귀환을 간절히 기원한다. 귀명창들의 지혜를 모아 명창의 공업(功業)을 이루게 할 명고수들은 어디에 있는가.
최원식 인하대 교수·국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