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서울 종로3가에서 호객행위를 하고 있는 매춘 여성들. 1968년 철거되기 전까지 속칭 종삼으로 불리던 종로3가는 한국 최대의 사창가였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관내 巡警용돈 醵出하는 賣笑婦▼
부산 완월동에 산재한 매소부 포주(抱主)들은 매달 七천환의 세금 아닌 세금을 ‘조합장’ 金모에게 바치고 전기 조합장은 포주들로부터 매달 합계 三십五만환을 걷어서 어떤 기관에 또다시 바치고 있다고…. 그런데 더구나 가소로운 것은 전기 조합장은 각 포주들로부터 “우리는 매월 七천환씩 金조합장에게 월급(月給)을 지급하는데 그 용도에 대하여는 일체 불문(不問)한다”는 서약서까지 받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또 한 가지, 서울 시내 모 경찰서 관내 모 파출소에서 일어난 일인데, 동파출소 경찰관들은 관내에 있는 매소부 포주 십二명으로부터 지난 二월부터 九월까지 매인당 천二백환씩을 징수하여 파출소 후원비(後援費)라는 명목 아래 직원들이 분배하여 ‘용돈’으로 써 왔다는데 이 사실을 안 ‘감위’에서는 전기 파출소원들을 문초 중에 있다 한다.
▼집창촌-단속경찰 탈도 많은 악연▼
지금도 외국인 선원이나 여행자 등이 많이 찾는다는 부산 완월동 집창촌은 대한제국 말기인 1907년경 일본인들이 조성한 ‘유서 깊은’ 사창가다. 일제강점기에는 이곳뿐 아니라 전국 주요 항구 및 대도시에 ‘당국이 보증하는’ 홍등가가 번성했다. 물론 이때의 매춘은 합법이었다. 공창(公娼)을 인정하는 일제의 정책 때문이었다.
광복 후 1947년, 미군정 당국은 매춘을 불법화했다. 하지만 홍등가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신종 부조리가 기승을 부렸다. 기사에서처럼 불법 매춘업소를 운영하는 포주와 이를 단속하는 공권력간에 유착관계가 형성된 것. 1954년 당시 쌀 1가마니 값이 50∼60환이었으니, 완월동에서 매춘업소를 운영하려면 매달 쌀 100가마니 이상의 돈을 상납해야 했다는 얘기다. 그 비리가 얼마나 극심했으면 정부 감찰위원회까지 나서서 특별 감찰을 했을까.
홍등가는 이래저래 골치 아픈 존재였다. 사회 여론이 들끓을 때마다 단속의 철퇴가 가해졌다. 1968년 김현옥 서울시장은 당시 국내 최대의 윤락가였던 서울 ‘종로3가(종삼)’를 대대적으로 단속해 대부분 무허가 건물이던 윤락업소를 아예 철거해 버리는 방식으로 초토화했다. 하지만 이 또한 근본책이 못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쫓겨난 포주와 매춘녀들이 ‘청량리 588’, ‘미아리 텍사스’ 등지로 옮겨 영업을 계속했다.
윤승모기자 ysm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