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말리는 4시간이 거듭 무승부로 봉합됐다. 국내 프로야구의 챔피언을 가리는 한국시리즈에서의 일이다. 경기시간이 4시간을 넘어서면 새로운 이닝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규정 탓에 3번이나 무승부로 끝났다. 반면 바다 건너 미국의 월드시리즈는 6시간 가까운 혈전 속에서 86년 만에 ‘밤비노의 저주(보스턴 레드삭스가 홈런왕 베이브 루스를 방출한 뒤 한 번도 우승을 하지 못한 징크스)’를 풀었다느니 하며 현대판 전설을 써냈으니 이래저래 우리 프로스포츠 문화의 미성숙이 드러난 셈이다.
미국 메이저리그는 아래 단계인 마이너리그 ‘트리플A’에서 수시로 선수를 차출해 급한 불을 끄며 불펜 투수들은 2이닝 정도만 책임지는 것이 거의 ‘관습헌법’으로 통용되고 있다. 데이터 야구로 알려진 일본 역시 선수 관리가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반면 우리는 한 해 농사를 결정짓는 고비가 오면 ‘선수 보호’는 뒷전이고 한두 명의 투수에게 생사를 건다. 박철순 김시진 장명부 이후로 얼마나 많은 투수가 ‘화려하게’ 사라지고 말았던가. 우리의 선수층은 대단히 얇기 때문에 무승부가 선수 보호장치의 성격을 띤다.
무승부는 공중파방송에 대한 ‘러브 콜’의 인상도 짙다. 해마다 공중파를 통한 야구 중계는 줄어드는 추세다. 프로야구 수익의 상당액을 차지하는 ‘중계권료’ 때문에라도 프로야구 쪽에서 방송국에 ‘4시간짜리’ 보증서를 써준 셈이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무승부 제도는 원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있다. ‘4시간짜리’ 약속어음에도 불구하고 방송사의 생중계는 늘지 않았다. 선수 기용에 갑자기 여유가 생긴 것도 아니다. 야구팬들은 벌써부터 혹사당하는 삼성의 배영수 투수를 걱정하고 있다.
10여년 전의 신문과 요즘의 신문을 대비해 보라. 주5일 근무제로 상징되는 ‘직접체험 문화’ 시대 이후 일간지의 ‘주말판’은 간접체험 성격의 프로스포츠 대신 맛 레저 여행 등 수많은 ‘체험 문화’들에 장악되고 있다.
그러므로 프로스포츠는 승부를 내야 한다. 주말 펜션이나 해변에서는 맛볼 수 없는 비정하면서도 통렬한 맛을 되살려야 한다. 삶의 이중성, 승패의 엄정함, 비정한 쾌감은 오로지 스포츠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삶은 엄숙하지만 일상은 지루하다. 그 일상의 권태와 삶의 불확실성에 비해 스포츠는 얼마나 명확한가. 정치인들의 남루한 언어들, 휴대전화 벨소리에 불과한 음악들, 너무 쉽게 결말이 드러나는 영화들. 이에 비해 스포츠는 얼마나 드라마틱한가. 서로를 응시하는 투수와 타자의 시선은 냉정하면서도 우아하게 삶의 본질로 바짝 다가간다. 사람들은 그 한복판으로 몰려와 생과 사의 비정하면서도 엄숙한 절정의 순간의 증인이 되려고 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무승부라니 말도 안 된다. 한국시리즈가 무승부의 ‘진기록’을 세운 것은 이번으로 족하다. 무승부는 승패를 알 수 없는 미궁에서 소실점(회화에서 물체의 연장선을 그었을 때 선과 선이 만나는 점)을 향해 치열하게 질주한 선수와 팬들에게 안개처럼 흐릿한 삶의 불확실성만 환기시킬 뿐이다.
얇은 선수층 때문에 오히려 선수들은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렸다. 사실상의 ‘퍼펙트 게임’까지 기록한 배영수. 팬들은 그가 제2의 박철순이나 박충식이 되는 걸 결코 원하지 않는다.
정윤수 스포츠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