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전이 유배당시 살았던 초가집.
《지난달 27일 오전 흑산도로 가는 쾌속선을 탔다.
빈자리가 거의 안 보인다.
전날 폭풍주의보 때문에 배가 뜨지 않았기 때문이다.
폭풍주의보가 풀린 직후의 바다는 겉으로 보기엔 평안했지만 먼바다로 나가자 본색을 드러냈다.
홍어 가운데 8kg 이상 나가는 큰 놈들을 ‘1번치’라고 하는데 한 마리에 수십만원 한다.
몇 m 높이의 파도가 쉴 새 없이 밀려왔다.
쑤욱 올라갔다가 휙 떨어지기를 수십 차례, 처음에는 놀이기구를 탄 것처럼 즐거워하던 여행객들은 곧 신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뭍사람들이다.
섬이라는 공간의 본질을 한 마디로 말하면 단절이다.
단절은 섬사람에겐 현실이고 운명이다.
뭍사람들은 ‘섬’ 하면 ‘그리움’이니‘낭만’이니 하는 단어를 떠올린다.
바라보는 동안 섬은 관념적인 영역에 머물고 실제로 섬에 갈 때만 현실이 된다.
이날처럼 파도라도 높아지면 ‘그리움’은 바로 ‘괴로움’으로 바뀐다.
그래도 사람들은 섬으로 간다.》
○ 홍어잡이 배
2시간의 고통스러운 항해 끝에 도착한 흑산도 예리항. 이곳은 그 유명한 흑산도 홍어의 고향이다. 부둣가엔 수십 척의 고깃배가 묶여 있는데 그 가운데 홍어배도 끼어 있다.
전날 들어왔다는 제33 창진호 갑판에서 선원들이 주낙을 정리해 바구니에 담고 있었다. 홍어 배들은 20∼50t 규모로 한 척에 보통 7명 정도가 탄다. 요즘 이곳에선 10여척이 홍어잡이를 하고 있다.
홍어잡이 배는 80년대 말까지만 해도 40척 가까이 됐다고 한다. 그러나 97년 단 한 척으로 줄었던 적이 있다. 홍어가 잡히지 않자 수지타산이 안 맞아 다들 홍어잡이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당시 홍어 어획량이 급감했던 이유에 대해 중국의 저인망 어선이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해 홍어를 잡기 위해 쳐놓은 주낙을 끊어놓았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무분별한 남획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뭍에서는 ‘흑산도 홍어의 씨가 말랐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그러다 1998년 봄부터 어획량이 조금씩 늘었다. 정부에서 흑산도 홍어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지원금을 주면서 홍어잡이가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90년대 중후반에 비해 요 몇년 새 홍어 어획량이 크게 늘어났지만 여전히 뭍에서 흑산도 홍어를 구경하기는 어렵다. 그새 수요도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인터넷 ‘홍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홍좋사모·cafe.daum.net/hongaclub)의 회원이 2000명을 넘어섰다고 하니 홍어는 더 이상 일부 아저씨들이나 먹는 음식이 아니다.
○ 홍어의 계절
홍어는 일년 내내 잡히지만 11월부터가 제철이다. 산란기를 맞은 홍어가 흑산도 근해로 몰려들어 많이 잡히기 때문이기도 하고 겨울이라야 홍어의 찰진 맛이 살아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홍어 배는 한번 출항에 보통 4, 5일씩 걸리는데 항구에 돌아온 배들은 홍어를 내려놓고 그물을 손질하며 다음 항해를 준비한다. 배가 들어오면 바로 그 자리에서 경매가 열려 홍어는 중매인들의 손으로 팔려나간다. 어획량에 따라 다르지만 8kg 정도 되는 ‘1번치’들은 한 마리에 보통 수십만원씩 한다. 공급이 달리면 100만원이 훌쩍 넘기도 한다.
흑산도 홍어가 요 몇년 새 많이 잡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획량은 들쭉날쭉하다. 뱃사람들에게 “한번 나갈 때마다 얼마나 잡히느냐”고 물었더니 “한번 나갈 때 두 마리도 잡고 200마리도 잡고…”라고 대답한다.
홍어를 잡는 방법도 억척스럽지 않다. 홍어는 움직임이 빠르고 깊은 곳에 있기 때문에 첨단 장비로도 탐지가 잘 안 된다. 거의 선장의 경험과 감에 의존한다.
그물이 아니라 낚시로 잡는데 미끼를 쓰지 않는다. 수십m 되는 바다 밑에 미늘도 없는 ‘ㄷ’자형의 바늘을 촘촘히 길게 늘어놓은 뒤 홍어가 지나다 걸리길 기다린다. 낚싯줄을 감다가 홍어가 올라오면 꼬챙이로 일일이 찍어 올린다. 그래서 홍어의 몸통엔 꼬챙이 자국이 남아 있다.
○ 흑산도의 절경
홍어에 관심이 없다 해도 흑산도는 매력이 있다. 인근 홍도만큼 볼거리가 많은 섬이다. 40km에 이르는 해안선 곳곳이 절경이다.
흑산도를 제대로 둘러보려면 섬 일주도로를 타야 한다. 흑산도는 섬답지 않게 산세가 높고 험하다. 강원도 어느 산간 지방을 옮겨온 것 같다.
96년에야 섬 전체를 도는 도로가 뚫렸는데 여전히 비포장 구간이 많고 경사도 급하다. 제대로 돌려면 6만원을 주고 섬에 있는 지프형 택시를 대절해야 한다.
예리항을 출발해 시계 방향으로 섬을 돌았다.
사리는 정약용의 둘째 형 정약전의 유배지다. 그가 살았다는 초가집이 복원돼 서 있다. 그는 1801년 쉰이 넘은 나이에 천주교 포교 활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흑산도에 왔다. 이곳에서 부근의 어류에 대해 자세한 기록을 남겼는데 그게 유명한 자산어보(玆山魚譜)다.
1876년 강화도조약에 반대해 귀양살이를 했던 면암 최익현 선생의 당시 유배지도 흑산도였다. 면암은 천촌리에 3년간 머물렀는데 그가 바위에 직접 새겼다는 글씨가 남아 있다.
자산의 자(玆)나 흑산의 흑(黑)이나 모두 ‘검다’는 의미다. 섬 주민 이문웅씨(64)는 “섬 전체를 뒤덮은 상록 활엽수 때문에 섬의 색깔이 푸르다 못해 검게 보이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설명했다.
1시간 반을 돌아 상라봉에 도착했다. 일몰이 장관이라는 명성을 들은 터라 일부러 해가 떨어지는 시간에 맞췄다. 해는 불과 몇 분 남지 않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일몰 무렵 서쪽 하늘은 초 단위로 색깔이 바뀐다. 찬찬히 들여다보니 누런빛이 다소 잦아들면서 붉은빛이 점점 더해진다. 그러다 순식간에 해가 넘어가고 하늘엔 붉은 잔상만 남았다.
어둠이 내리자 저 너머 예리항에 하나둘 불이 켜지는 게 보였다.
상라봉에서 바라본 흑산도의 모습. 만 건너편에 보이는 항구가 홍어잡이 배들의 본거지인 예리항이다.
글=홍석민기자 smhong@donga.com
사진=강병기기자 arch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