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내 터키인의 시선으로 이민족의 문제를 다뤄 호평 받은 ‘미치고 싶을 때’. -사진제공 프리비젼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소개된 뒤 조용히 화제를 뿌려 온 영화 ‘미치고 싶을 때’는 뉴 저먼 시네마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됐음을 알려주는 작품이다. 곰곰이 생각하면 독일영화는 현재 새로운 진보주의의 씨앗을 품고 있다.
지난해 개봉돼 비교적 흥행에 성공한 ‘굿바이 레닌’과 5월 칸영화제에서 화제를 모았던 한스 웨인가르트너 감독의 ‘교육자들’은 독일영화의 변화를 나타내는 징표를 보여주었다. 이번에 국내 개봉되는 ‘미치고 싶을 때’는 단순히 변화를 보여주는 정도가 아니라, 제목에서 느껴지는 대로 독일영화계의 격렬한 몸짓과 내면의 고통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을 보고 있으면 올 2월에 열린 베를린영화제에서 왜 이 영화에 최고상인 황금곰상이 수여됐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굳이 국적을 따지자면 독일영화이긴 하지만 속내는 터키의 정체성을 갖고 있는 이 영화에 왜 베를린이 절대적 지지 의사를 표했을까.
실제 영화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터키 수도 이스탄불을 배경으로 찍었다. 이 작품은 ‘유럽의 질주하는 기관차’라는 별명을 갖고 있을 만큼 가장 빠르게 부를 축적한 국가로 알려진 독일이 그 경제적 부를 이루기까지 이면에 이민족 문제를 얼마만큼 심각한 상태로 방치해 왔는가를 보여준다.
여배우 시벨 케킬리
하지만 이 영화는 지금까지와 달리 바깥에서, 곧 독일인의 시선에서가 아니라 이민족 커뮤니티의 시선에서 이민족의 문제를 그려낸 거의 첫 작품에 해당한다. 바로 그 점에서 베를린영화제를 포함해 많은 국제영화제들이 한결같이 높은 점수를 매겼을 것이다.
독일 사람들은 지금까지 터키 불법이민자들 때문에 미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독일 사람들보다 터키 불법이민자들이 더 미치고 싶어 했음을 알 수 있다. 나 아닌 다른 사람, 우리 안에 있는 많은 타자(他者)들도 같은 심정일 수 있다.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의 고통, 그 아픔에 대해 우리가 어떤 시선을 가져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상당부분 여배우 시벨 케킬리 때문에 일찌감치 대중에게 알려진 작품이기도 하다. 그녀가 전직 포르노 배우였다는 소문은 이 영화가 파격적이고 ‘하드 코어’적인 영화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포르노 배우였든 그렇지 않든, 그 소문만으로 이 영화를 찾는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을 듯하다. 이 영화는 그 같은 호기심보다 수백배, 수천배의 진정성을 지니고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시벨 케킬리는 보수적인 이슬람교 집안에서 뛰쳐나와 홀로 살아가는 당찬 터키계 여성 역을 맡았다. 독립을 위해 잘 알지도 못하는 터키계 남자와 계약결혼까지 하지만 결국 그녀는 그 남자와 파행적인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남자는 자신 때문에 빚어진 살인사건으로 감옥으로 끌려가게 되고, 이스탄불로 돌아온 주인공 시벨(영화 속 주인공 이름도 시벨이다)은 한 카페에서 술과 마약에 취해 격렬하게 몸을 흔들어 댄다. 술에 엉망으로 취한 상태에서 그녀는 카페 주인에게 강간당한다. 그런 그녀에게 남아 있는 것은 끊임없는 죽음에의 유혹뿐이다. 시벨 케킬리가 없었다면 영화 속 시벨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이 영화에서 한 이름 없는 전직 포르노 여배우의 역할은 크다. 격렬하게 몸을 흔들어 대면서 그녀는 관객들에게 이렇게 묻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당신들은 미치고 싶을 때가 없느냐고. 미치고 싶을 때 미치지 못하는 것도 비정상이라고. 우리 다 함께 거짓된 세상을 폭파시켜 버리자고. 그녀의 권유에 찬성표를 던지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여러분들의 몫이다.
12일 개봉. 18세 이상 관람 가.
오동진 영화평론가 ohdjin@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