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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오명철]승복(承服)

입력 | 2004-11-04 18:50:00


한국인과 일본인의 사회 심리적 특성을 ‘오기(傲氣)’와 ‘앗사리(あっさり)’로 구분한 문명비판가가 있다. 한국인들은 은근과 끈기가 오기로 발동해 쉽게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반면, 일본인들은 할복(割腹)으로 맞서다가도 한번 굴복하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것이다. 일본이 한국의 독립운동을 그토록 악랄하게 탄압한 것도 한국인의 오기에 대한 반감인지도 모른다는 해석도 있다. 역설적으로 만일 일본이 인도를 통치했다면 간디의 ‘무저항주의’는 결코 용납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전후 일본을 통치한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가미카제’로 미국 군함에 뛰어들 정도로 무모했던 일본인들의 극렬한 저항이었다. 천황제를 존치키로 한 것도 국민 여론 무마를 고려한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하루아침에 ‘순한 양(羊)’으로 변신해 미군정(美軍政)을 받아들였다. 미군을 상대로 영업을 시작한 일본 ‘직업여성’들 또한 조국을 위한 복수를 도모하지 않았고, 사회도 그들을 ‘양공주(洋公主)’로 대하지 않았다.

▷그런 각도에서 보면 미국인들은 ‘룰(Rule)’을 중요시한다. 다양한 인종과 역사적 전통이 조화를 이뤄 살아가기 위한 ‘사회적 합의(合意)’다. 이는 서부 개척시대 총잡이들의 결투문화에 잘 투영돼 있다. 권총을 들고 등을 마주 댄 뒤 다섯 걸음 또는 열 걸음을 걸어간 뒤 돌아서서 승부를 가리는 전통이다. 먼저 뒤돌아서서 총을 쏘는 반칙 행위는 상상도 할 수 없다. 아들이 상대방의 등에 총을 쏘려 하자 결투를 지켜보던 악당 아버지가 자식을 먼저 쏴 죽이는 영화도 있다.

▷천신만고 끝에 재선된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존 케리 상원의원이 전화를 해 ‘진정으로 유익한 대화’를 나눴다”며 국민 통합을 호소했다. 케리 또한 “선거 결과는 유권자들이 정해야지 지루한 법적 소송으로 해결할 일이 아니다. 이제 ‘치유를 위한 시간’이 왔다”고 선언했다. 승자보다 패자가 더 아름다워 보인다. 미국의 민주적 전통과 저력을 확인시켜 준 감동의 정치적 이벤트다. 한국인의 오기 탓일까? 당사자도 받아들인 미대선 패배를 한국사회 일각에서는 여전히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눈치다. 승복은 결코 항복이 아닌데….

오명철 논설위원 osca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