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딕트 앤더슨은 民族을 ‘상상의 공동체’라고 했다. 이 주장은 민족을 혈연이나 지연 공동체로 간주하던 전통적인 관점을 뒤집어 놓았다. 그러면 한자의 자원으로 본 民族의 개념은 어떤 것일까?
民은 금문(왼쪽 그림)에서 예리한 침 같은 것에 한쪽 눈이 찔린 사람의 모습이다. 옛날 전쟁에서 포로를 잡을 경우, 남자이면 한쪽 눈을 찔러 노동력은 보존하되 반항능력은 줄여 노예로 삼았다. 이러한 모습은 臧(착할 장)이나 童(아이 동)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래서 民의 원래 뜻은 노예이며, 이후 지배자의 통치를 받는 계층이라는 의미에서 ‘백성’이라는 뜻이 나왔고, 다시 ‘사람’이라는 일반적 의미로 확장되었다.
族은 갑골문(오른쪽 그림)에서 깃대 아래에 사람(大·대)이나 화살(矢)이 놓인 모습인데, 간혹 두개씩 그려 그것이 여럿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화살은 가장 대표적 무기이기에 전쟁을 상징한다. 그래서 族은 ‘화살’이라는 의미로부터 함께 모여 전쟁을 할 수 있도록 같은 깃발 아래에 함께 모일 수 있는 공동체를 뜻하게 되었다. 그러자 원래의 화살이라는 의미는 金(쇠 금)을 더한 鏃으로 ‘화살촉’의 의미를, 竹(대 죽)을 더한 簇으로 ‘화살 대’를 구분해 표현했다.
이렇게 볼 때, 民은 통치자의 통치력이 미치는 영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며, 族은 그 통치자의 명령에 자신의 생명을 내놓을 수도 있는 사람들, 즉 전쟁터에 나가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따라서 民族이라는 개념은 혈연이나 지연과 같은 어떤 생물학적이고 자연적이며 지리적인 특성에 의해 생겨난 고정된 개념이기보다는, 통치자의 지배력이 행사될 수 있는 영역 내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그 통치 이념에 동조하거나 어떤 형식으로든 종속되어 있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民族의 이러한 자원은 고대 사회에서 민족이 반드시 혈연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다른 지역 출신자들도 같은 민족의 성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유동적 개념이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한 민족의 불변하는 본질이나 민족을 구분하는 절대적 기준은 없다.
쉽게 말하자면, 독일인 사업가인 이한우씨는 다른 나라 출신이지만 한국인으로 귀화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성원이 되고, 군 복무를 거부하고 미국 땅으로 건너간 가수 유승준씨는 우리와 똑같이 생기고 같은 피를 나누었다 하더라도 암묵적으로 합의된 우리 민족의 이념을 위배하였기에 더 이상 우리 민족이 아닌 것이다.
하영삼 경성대 교수 ysh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