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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⑫美의 한반도정책 혼선

입력 | 2004-11-07 18:06:00

얄타회담과 ‘트루먼 독트린’… 美-蘇관계 ‘극과 극’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소련과의 협력을 중시하는 얄타학파의 뜻에 따라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의 모든 문제는 미국과 소련이 공동으로 해결한다’고 소련과 합의해 한반도 문제에 소련을 끌어들였다. 그러나 대통령직을 승계한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1947년 3월 12일 발표한 ‘트루먼 독트린’을 통해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을 소련에 대한 봉쇄정책으로 바꿨다. 왼쪽은 얄타회담에 참석했던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대원수,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앞줄 왼쪽부터). 오른쪽은 트루먼 독트린이 담긴 연설문 첫 장.동아일보 자료사진



《광복이후 건국까지 해방 3년사의 수수께끼 가운데 하나는 미국의 한반도정책이 왜 오락가락했을까 하는 것이다. 미국은 남한 점령 초기만 해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부인했다가 2∼3개월쯤 지나서는 임정을 중심으로 남한에 ‘정부’를 세우려는 안을 검토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전(全)조선적 임시정부’를 세우는 안을 추진했다. 또 어느 시점에서는 여운형에 대해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속임수 연극을 꾸민 사기꾼’이라고 매도했다가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그가 임정의 김규식과 함께 좌우합작을 꾀하도록 뒷받침하기도 했다. 미국의 이러한 정책 혼선이 해방정국의 혼란을 불러일으킨 하나의 원인이 됐음은 물론이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 미국은 한반도 상황을 너무 몰랐다

첫째, 남한을 점령한 미군의 고위 장성들이 남한은 물론 한반도 상황을 너무 몰랐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미국 무지설(無知說)’이다. 우선 남한 점령군사령관 존 하지는 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 출신도 아니면서 육군 중장까지 올라간 전형적인 야전군인이었다. 전장을 누비며 많은 전공을 쌓은 그였지만 정치적 훈련을 전혀 받지 않아 광복 직후 남한사회가 안고 있는 정치적 복잡성과 민감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서울이 어떤 곳인지, 한민족이 어떤 민족인지 잘 알지 못했다. 인천에 상륙할 무렵 한민족을 ‘고양이와 같은 부류’라고 비하한 것으로 알려져 문제가 된 적도 있다.

그는 곧 외신기자가 자신의 발언을 잘못 알아듣고 오보를 냈다며 이 발언을 부인했지만, 그 뒤에도 한민족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발언을 멈추지 않았다. 서울에 진주한 직후 각 정당대표들을 불러 훈계하듯이 연설을 한 것도 ‘한민족은 미개한 민족’이란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고 할 수 있다.

● 하지는 국제정치 흐름에 어두웠다

둘째, 남한을 점령한 미군사령부와 본국 정부 사이에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했다. 1945년 12월 하순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국 영국 소련의 외무장관회의에서 미국의 제안이 받아들여져 한반도에 대해 신탁통치를 실시하기로 결정했을 때 하지가 배경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하지는 ‘소련이 신탁통치안을 제의했고 관철시켰다’는 외신보도가 사실일 것으로 이해하고 공개적으로 “미국은 한민족의 편에 서서 신탁통치에 반대할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련 외무부가 신탁통치안은 미국이 제의했음을 밝히고 미국 정부도 그것을 확인하자 하지는 매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일로 하지에 대한 남한사람들의 신뢰는 크게 떨어지고 말았다.

● 미국정부부터 중심을 잡지 못했다

셋째, 더 근본적인 원인은 미국 정부에 있었다. 미국 정부 자체가 중심을 잡지 못했다는 뜻이다. 특히 소련과의 관계에서 그런 현상이 두드러졌는데, 그 뿌리는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러시아에 인류 역사상 최초의 공산정권이 세워졌을 당시 미국 정부는 이를 ‘불한당들이 불법적으로 세운 정권’ 정도로 여기며 승인을 거부했다. 이로써 미국과 소비에트 러시아 사이에 외교관계가 끊겼다.

그러면서도 미국 정부는 이 새로운 정권을 관찰할 필요를 느껴 이웃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 대사관을 세우고 엘리트 외교관들을 파견했다. 그들은 주로 소비에트 지도자들의 공식발언을 분석하면서 러시아 망명자들을 만나기도 하고 소비에트 러시아에 나도는 전단과 소문을 수집하기도 했다.

● 소련과의 대결을 주장한 ‘리가학파’

그 결과 그들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지도이념인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전 세계의 공산화를 추구하는 것이며,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의 기본적 가치와 공존할 수 없는 것인 만큼, 이 이질적인 정권에 대해 미국은 봉쇄정책과 대결정책을 채택해야 한다’는 결론을 끌어냈다. 이 정책을 성안하고 지지한 미국외교관들을 ’리가학파‘라고 불렀다. 뒷날 소련 대사와 유고슬라비아 대사가 되는 조지 케넌, 소련 대사와 프랑스 대사가 되는 찰스 볼렌 등이 이 학파의 지도자들이었다.

1930년대로 접어들면서 미국 정부 안에 새로운 흐름이 나타났다. 독일의 나치즘과 이탈리아의 파시즘이 유럽에서 세력을 넓혀나가는 것을 불길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그 새로운 극우적 세력과 이념을 견제하기 위해 소련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이다. 나치즘과 파시즘은 소련을 적대시했다.

● 한국에 소련을 끌어들인 ‘얄타학파’

당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그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분신이나 다름없던 해리 홉킨스를 특사로 임명해 소련을 방문하도록 했다. 노회한 스탈린은 그 기회를 잘 활용해 홉킨스를 안심시키는 쪽으로 대화를 이끌었다. 홉킨스는 귀국한 뒤 루스벨트에게 “스탈린은 공산주의를 수출할 생각이 없으며 미국과 손을 잡고 나치즘과 파시즘에 대항할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다”고 보고했다.

이에 루스벨트는 소련과의 화해 및 협력을 추구했으며, 그런 정책은 1945년 2월 얄타에서 열린 미국 소련 영국의 3개국 정상회담 때 정점에 이르렀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 세계의 크고 작은 모든 문제들을 미국과 소련이 공동으로 해결한다는 데 원칙적 합의를 본 것이다. 이처럼 소련과의 협력을 중시하는 사람들을 ‘얄타학파’라고 불렀는데, 그 중심에 루스벨트가 있었다.

● 트루먼 승계後 바뀌는 미국의 기류

한반도 문제에 소련을 끌어들인 정책은 얄타학파의 산물이었다.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 구상과 거기에 소련을 참여시키기로 결정한 게 그들이었다.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한반도 문제를 해결한다는 구상을 끝까지 밀고 나가려 했던 것도 그들이었다. 얄타학파의 이 같은 입장은 1945년 4월 하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유엔 창립총회가 열렸을 때도 나타났다.

나중에 ‘소련의 첩자’로 몰리게 되는 미 국무부의 법률고문 앨저 히스는 이승만이 유엔 회의장에 나타나 “한반도 문제에 소련을 개입시켜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자 그를 ‘극단적인 반공·반소주의자’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1945년 4월 12일 루스벨트가 병사하고 해리 트루먼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면서 이미 미국 정부의 분위기는 급변하고 있었다.

● 美 정부의 혼선 속에 굳어지는 분단

철저한 반소·반공주의자인 트루먼은 얄타학파의 논리를 배척하고 리가학파의 정책을 선호했다. 그렇다고 해도 루스벨트가 만들어놓은 틀을 하루아침에 깨뜨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바로 여기서부터 미국 정부의 세계정책과 그 한 부분으로서의 한반도정책이 혼선을 빚게 됐다. 여전히 일정하게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던 얄타학파는 소련과의 협력을 중시했고, 새로 힘을 얻게 된 리가학파는 소련에 대한 강경 대응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혼선은 1947년 3월 트루먼이 소련에 대한 봉쇄정책을 다짐한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면서 서서히 정리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사이 한반도상황은 악화돼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분단이 굳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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