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서 ‘좌파면 어떠냐?’는 치명적이다. ‘반미(反美)면 어떠냐?’에 비할 수 없다. 반미는 ‘할 말은 하는 자주(自主)’로 비켜갈 수 있으나 좌파는 ‘친북(親北) 용공(容共)’에서 피해가기 어렵다. 집권당 의장은 “내가 좌파면 국가보안법으로 고발하라. 그러면 가서 또 고문당해 줄 용의가 있다”고 말한다. 이 격한 발언의 밑바닥에는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좌파 콤플렉스’가 자리 잡고 있다.
남한 사회는 아직 ‘살인의 추억’보다 끔찍한 ‘좌익의 추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냉전시대의 맹목적 반공 이데올로기야 상당 부분 희석됐다고 하지만 좌파에 대한 불신과 적의(敵意)의 농도는 여전히 진하다. 김정일 북한정권이 “한 핏줄을 나눈 동족인 북과 남 사이에는 서로 위협하고 싸워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북한 ‘노동신문’ 10월 30일자 논설)며 ‘민족 공조’를 강조할수록 좌파에 대한 의구심과 적대감만 커질 뿐이다.
▼분단 사회의 잣대▼
분단의 질곡(桎梏)이다. 오늘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갈등과 분열, 혼돈의 근원을 찾아 내려가면 남북 분단의 비극에 맞닿을 수밖에 없다. 문제는 분단의 현실을 당장은 극복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무력통일도, 흡수통일도 비현실적이다. 평화 공존이 현실적 대안(代案)이며 그것을 우리 나름으로 구체화해야 한다. 그러자면 내부의 혼돈부터 정리해나가야 한다. 그 혼돈의 중앙에 ‘좌파 논쟁’이 있다.
사실 눈을 한반도의 현실에서 돌리면 ‘좌파 논쟁’은 시대착오적이다. 최근 남미에는 ‘좌파정권’이 줄을 잇고 있다. 베네수엘라,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에 이어 우루과이에도 좌파 후보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민의(民意)가 등을 돌린 결과다. 유럽에서는 이미 1990년대부터 사회민주주의(좌)와 신자유주의(우)를 절충하는 ‘제3의 길’이 모색돼 왔다. 브라질의 ‘좌파 대통령’ 룰라가 집권 뒤 우파정책을 과감하게 수용한 것은 이미 뉴스가 아니다.
그러나 이렇듯 상대적이고 상호보완적인 좌우(또는 진보-보수)의 개념은 세계 유일의 분단체제인 한반도에서는 현실적합성을 얻기 힘들다. 따라서 “분단 없는 사회의 잣대로 진보와 보수를 재단하는 것은 도리어 분단체제 극복에 역행할 우려가 있다”는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의 진단(‘중앙일보’ 11월 4일자 시평)은 적절하다.
그렇다면 현 정권의 ‘좌파적 성향’도 분단 사회의 잣대로 견주어봐야 한다. 그리고 그 잣대를 분명하게 하자면 집권측에서 오히려 ‘좌파면 어떠냐?’는 소리가 나올 수 있어야 한다. 경제전문가 100명 중 69명꼴로 참여정부의 정책기조를 좌편향적(‘문화일보’ 10월 29일자 여론조사)이라고 답하는 마당에 “좌파면 고발하라”고 해봐야 혼돈이 정리될 수 없다. 차라리 ‘이러저러한 정책은 좌파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분단 체제에서도 문제없다’고 국민을 설득하고 동의(同意)를 구하는 편이 낫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좌파=친북=용공’이라는 한국 사회의 경직된 이념구도를 유연화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개혁의 깃발 뒤에 숨어서야▼
또한 실제 여부와는 관계없이 현 정권의 이데올로기적 성향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정권 내 386그룹’은 자기 고백을 해야 한다. 비록 전두환 파쇼정권이 자생(自生)시킨 측면을 감안한다하더라도 그들이 과거 ‘친북(親北) 좌회전’에 기울었다면 그동안 ‘우회전’을 했는지, 아니라면 그들이 무엇을 지향하는지 털어놓아야 한다. 그런 용기나 진정성도 없이 개혁의 깃발 뒤에 숨어 ‘보수=수구꼴통=반(反)개혁’이라고 목청을 높여서야 ‘좌파 정권’의 혐의를 짙게 할 뿐이다.
우파의 상대적 가치로서 좌파가 인정되려면 도리어 그 색깔을 분명히 해야 한다. ‘색깔론-역(逆)색깔론’으로는 혼돈만 가중된다. 오른쪽 깜빡이를 켜고 좌회전을 해선 안 된다. 좌회전을 하려면 분명하게 왼쪽 깜빡이를 켜라. “좌파면 어떠냐?”고 말하지 못하는(않는) 좌파. 그것이야말로 2004년 남한사회 좌파의 덫이 아니겠는가.
전진우 논설위원 실장 youngji@donga.com